【심사위원 인터뷰】 림정 교수,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관객 감동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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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이목구비와 똑같이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 부원장이며 석사생 지도교수인 림정 교수와의 전화통화는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10년전까지만 해도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음력설야회를 비롯한 각종 무대에서 가창력을 뽐냈던 림정 교수지만 2003년 이후부터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마이크 대신 교편대를 잡았기 때문이다.

2023년 세계조선족노래자랑대회는 세계 각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과 흥과 끼를 보여주고, 노래로 하나가 되자는데 취지를 두고 처음 펼쳐지는 행사이다. 국제적 노래시합의 심사위원도 여러번 맡은 경험이 있지만, 심사위원이라는 책임의 무게는 언제나 무겁게 다가온다는 림정 교수를 만나보자. 
문: 2023년 세계조선족노래자랑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은 소감 한마디 해주세요.
답: 조선족노래자랑을 비롯한 국내의 이러저러한 경연은 물론, 일찍 독일, 미국, 로씨야 등 나라의 요청을 받아 국제적 성악시합의 심사위원도 여러번 맡았는데요, 경력이 많다고 해서 심사위원의 무게가 결코 덜어지지 않더군요.
심사위원이란 작업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컴퓨터작업이 아니라, 정감이 있는 인간들의 ‘수작업’이죠. 공평, 공정한 심사를 바탕으로 하되, 심사위원의 자질 및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모두에게 설득가능한 심사기준, 그리고 이유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하겠죠. 
참가자들의 그 어떤 미세한 재능과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것 또한 심사위원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이며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는 건 절대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 노래자랑의 심사위원회는 벨칸토, 대중가요, 민요, 팝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경력있는 분들로 묶어졌다고 들었는데 유쾌한 합작이 기대되네요.

문: 2023년 세계조선족노래자랑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은 소감 한마디 해주세요.
답: 조선족노래자랑을 비롯한 국내의 이러저러한 경연은 물론, 일찍 독일, 미국, 로씨야 등 나라의 요청을 받아 국제적 성악시합의 심사위원도 여러번 맡았는데요, 경력이 많다고 해서 심사위원의 무게가 결코 덜어지지 않더군요.
심사위원이란 작업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컴퓨터작업이 아니라, 정감이 있는 인간들의 ‘수작업’이죠. 공평, 공정한 심사를 바탕으로 하되, 심사위원의 자질 및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모두에게 설득가능한 심사기준, 그리고 이유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하겠죠. 
참가자들의 그 어떤 미세한 재능과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것 또한 심사위원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이며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는 건 절대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 노래자랑의 심사위원회는 벨칸토, 대중가요, 민요, 팝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경력있는 분들로 묶어졌다고 들었는데 유쾌한 합작이 기대되네요.

문: 우리 민족은 자고로 춤과 노래를 즐기는 ‘흥’의 민족으로 불리우고 있는데요, 오늘은 우리 민족 성악예술의 발전에 대해서 칭찬 말고 ‘쓴소리’ 한마디 해주세요.
답: 다년래 연변가무단,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변군중예술관 등 기구와 단체에서 내놓은 무용작품들은 전국 최고상인 ‘련꽃’상을 비롯해 굵직한 상들을 수차 따냈어요. 경연무대, 회보공연에서 그 작품들을 보면 정말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요.
거기에 반해 노래 분야는 그렇다 할 상들이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무용작품은 기획부터 안무, 배우, 기교에 이르기까지 단체협력으로 완성되죠. 노래도 마찬가지예요. 부단한 노력으로 실력을 제고시키고 진짜 정력을 쏟아붓지 않는다면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일찍 제가 심수에서 펼쳐진 전국소수민족성악시합에서 벨칸토조 1등상을 수상했는데요, 이 시합을 앞두고 3개월 간 북경에 가서 스승을 모시고 정력을 집중해서 훈련을 받았어요. 결과는 당연히 만족스러웠구요.
가수의 길에는 천부도 중요하지만 노력과 희생이 동반한다는 점 각인시켜드리고 싶어요.

문: 남들이 보기에 너무나 화려한 성악가, 성악교육가의 길을 걸어오셨는데, 남다른 노력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답: 모든 우수한 사람들이 명문교를 나온 것은 아니지만, 훌륭한 교육배경은 우리가 좀 더 쉽게 성공의 길에 오르게 해줄 수 있는 닻이죠. 비교적 정규적이고 엄격하며 계통적인 음악교육을 받아온 저는 참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일찍 연변예술학교(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전신)을 졸업한 후 연변가무단에 배치받았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중앙음악학원에서 문학학사 학위를 따냈어요. 조선이나 한국의 성악 자료, 음악기교를 좀 더 깊이 파고 들기 위한 목적인 셈이었죠. 사실 흑룡강성 할빈시에서 태여나 자란 저는 조선어가 능숙하지 못했기에 그 부분을 꼭 보완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시대의 행운아였던 저에게 1999년에 조선음악무용대학으로 유학을 갈 기회가 차례졌고, 거기서 부박사 학위를 따냈죠. 조선과의 인연은 꽤 깊어서 그 후에도 여러번 시합과 학습하러 다녀왔는데, 저를 너무 좋아해주시고 아껴주셔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문: 본인의 음악행보 중 특별한 업적이나 이력이 있다면요?
답: 민족성악을 추구하고 발전시키려 노력했던 점을 꼽을 수 있겠네요. 민족성악은 민요도 아니고 민간의 희곡민가도 아닌, 제가 예술과 심미가치관에서 추구하는 경향에 치우쳐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지역특점과 조선족의 심미습관을 바탕으로, 조선, 한국과도 다르고 중국의 민요나 서양의 벨칸도와도 다른 자신만의 특색을 추구해왔죠.
그래서 일찍 대도시의 수많은 유혹도 뿌리치고 결연히 연변에 뿌리내리려 했어요. 물론 후에 어쩔 수 없는 변고로 인해 연변을 떠나기는 했지만요.
조선류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엔 일심으로 성급과학연구프로젝트인 <중국조선족특색이 있는 성악체계 구축>에 전념을 다했구요, 저의 이름으로 명명된 ‘연변림정조선족성악연구소’를 설립했어요.
연구소에서 배출한 학생인 한선녀는 전국 제1회 ‘금종’상 3등상, 소수민족 ‘공작’컵 성악시합 2등상을 수상했구요, 또 다른 학생 정문연은 2003년 문화부에서 주최하는 문화상 1등상, ‘공작’컵 3등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어요. 또 저의 제자 최경해도 문화부에서 주최한 2018년 녕파국제성악시합에서 2등상을 수상하면서 연변의 목소리를 널리 알렸지요.

문: 이번 참가자들에게 ‘돈 주고 못사는 조언’ 한마디 해주세요.
답: 참가자들 중에서 저의 제자들의 얼굴이 보인다면 엄청 반갑겠지만, 한편 참가하지 말았으면 하는 모순된 심정을 갖고 있어요. 다름이 아니라 개인 감정에 휘둘릴까 걱정이예요. 하하.
저는 참가자들이 꼭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어요. 물론 음악 기교가 안받침되어야 하겠지만,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만이 관객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어요. 요즘 대중들은 심미능력과 감상능력 수준이 엄청 높아져서 웬만해서는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힘들어요. 하지만 진심은 꼭 전해지게 되어있어요.
마지막으로 등수도 중요하겠지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이번 시합을 계기로 뭉치는 화합의 장이 되고, 우리 노래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잔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미리 대회의 성공을 기원해요.
림정 프로필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 부원장, 박사생 지도교수.
・원 길림성문련 부주석.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원 부회장
・연변림정조선족성악연구소 법인.
・제20회 세계청년련환절 금상.
・제1회 전국‘중화가회’성악시합 에서 벨칸토 1등상.
・전국소수민족성악시합 벨칸토 1등상.
・제2회 전국소수민족문예회보공연 우수연원상.
・CCTV 30집드라마 《홍매꽃 피다》주제가 <모스크바에 있는 나의 사랑> 열창.
・2010년 이딸리아 독창음악회, 2012년 미국 텍사스대학교 독창연구회, 2019년 폴란드 제3회 국제예술절 사생음악회.
・2019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교수명사’칭호 획득.
  


취재 / 리련화: 연변일보 특집부 주임


리련화 프로필


•연변일보 특집부 주임
•해란강부간 책임편집
•2002년 연변대학 일어학부 졸업
•2002-2005년 동북전력대학 외사처 근무

•2007-2010년 연변대학 일어학부 석사학위 취득
•수필, 단편소설, 칼럼 등 20여편 작품 발표

반역소설 《남자애와 패왕어》 등 2권, 《신화를 엮어가는 겨레의 선두주자들》,《탐구자의 길-중국조선족과학자 29인》 등 출판

수상: 2011년 전 주 신문출판사업 선진개인상, 2017년 제6회 중국조선족신문출판문화대상, 2021년 연변작가협회 제10차 대표대회 우수문학사업자 칭호.

림정 교수



林晶,中央民族大学音乐学院副院长,硕士生导师。中国朝鲜族音乐研究会副会长,延边林晶朝鲜族声乐研究所法人。                                     
                                         
2019年获国家民委颁发“教学名师”称号。毕业于中央音乐学院声乐歌剧系,师从著名女高音歌唱家声乐教育家郭淑珍教授,获文学学士学位。

2000年获朝鲜音乐舞蹈大学副博士学位并由朝鲜国家副主席在万寿台亲自颁发学位证书。

2009年做为访问学者被国家留学生基金委选派到意大利罗马桑塔切契利亚音乐学院学习一年。

1992年在全国“少数民族”声乐比赛中荣获通俗组一等奖。                             
                                         
在朝鲜“四月之春”国际艺术节上获6次特别金奖,并受到朝鲜人民的伟大领袖金日成主席的好评,曾获第二十届世界青年联欢节金奖;获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颁发的“劳力勋章”。在中国文联,中国音乐家协会组办的全国首届由港澳台选手参加的“中华歌会”声乐大赛上,获美声组第一名,获由文化部、广电部国家民委组办的全国少数民族声乐大赛美声组第一名。获文化部,广电部,国家民委颁发的优秀演员称号。曾出版个人演唱专辑DVD、VCD和现场音乐会三盘光碟,曾在北京音乐厅成功举办林晶金永哲音乐会,并出版林晶金永哲“长白之夜”现场音乐会DVD专辑。                                 
                                         
在朝鲜留学期间发表二十万字的著作,题目《歌唱与发声的科学原理》,发表四篇国际论文,省级论文13篇,成立了以本人名字命名的声乐研究所《延边林晶朝鲜族声乐研究所》,并有科研立项,题为《建立具有中国朝鲜族特色的声乐体系》。

2023년 세계조선족노래자랑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공동주최 단체 리스트

・大連延辺商会
・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発展基金会
・在日中国朝鮮族経営者協会
・World-OKTA千葉支会

협찬 단체 리스트

・日本琿春同郷会

협찬 기업 리스트

・全日華不動産協会 金山張虎会長
・グローバル一通株式会社 権虎軍社長
・株式会社JCBC 厳田哲社長
・株式会社ケネス 黄海東社長
・株式会社G&T 朴春花社長
・T&C株式会社 金仁吉社長
・株式会社BTU 朴春益社長
・創権テック株式会社 金東陳社長
・株式会社ベストエンタープライズ 李星浩社長
・延辺料理千里香 金秋月社長
・三口一品キムチ 李星社長

협력 미디어

・SHIMTO Media 在日朝鮮族メディア
・潮歌网 朝鮮族新闻网
・东北亚新闻

개인 협찬 리스트

・許永洙:全日本華僑華人社団連合会 常務副会長/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名誉会長
・馬洪哲: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会長/在日朝鲜族足球协会 名誉会長
・李龍植:株式会社アジアンエクスプレス 社長
・崔永哲:大連延辺商会 会長/大連朝鮮族企業家協会 名誉会長
・崔雨林: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副会長/株式会社MARUEIグループ 取締役研究所長
・張京浩:新日本美術協会 審査委員/延辺大学日本校友会 名誉会長
・金光林:新潟産業大学 教授/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発展基金会 理事長
・金哲洙:日本農業新聞 論説委員/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事務局長
・金万哲:華人IT企業信用協会 会長/在日中国朝鮮族経営者協会 名誉会長
・全虎男:在日中国朝鮮族経営者協会 会長/株式会社ウィッツテクノロジー社長
・崔雲鶴:日本琿春同郷会 会長/株式会社ジーオー・ジャパン

상품 협찬 리스트

・魯紅梅: 蒲谷漢方研究所 所長/健康茶 50箱

※협찬을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리스트에 추가드리지 못한 분이 계시면 속히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
【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심사위원 인터뷰 르포】 최경호 가수, 일편단심 ‘사랑의 노래’로 대륙을 감동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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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 가수
중국동방연예그룹(中國東方演藝集團)의 대표적인 가수 최경호, 그는 ‘통속적인 대중가요로 인기몰이를 한 중국 성악계의 거장’으로 통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사회는 물론 중국 성악계에서도 최고의 정상급 인기 가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30여 편의 중국 영화나 TV드라마의 주제가나 삽입곡을 부른 유명 가수”이기에 최경호란 이름만 들어도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풍부한 음량과 시원한 가창력에 탄복하면서 엄지를 빼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인기는 그가 결코 톱클래스 가수라는 데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부모나 윗세대 어른들에 대한 지극한 효심, 가족과 불우 이웃에 대한 사랑, 고향과 지인들에게 베푸는 한없는 정, 그리고 공익사업에 헌신하는 사심 없는 마음과 바른 처사에서도 온다. 그리고 역경을 딛고 꿋꿋하게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견인불발의 기백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한마디로, 최경호 가수의 인생이 녹아 흐르는 노래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애(人爱, Philanthropy)’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정, 사랑, 효’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지난 5월 말 기자는 최경호 가수와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그가 ‘2023 세계조선족 노래자랑’ 심사위원에 위촉됐기에 심경을 듣고 그를 재조명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폐를 많이 끼치게 됐습니다” 그의 말은 가식 없이 솔직하고 겸손했다. “일본 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서 이번에 큰일을 했습니다. 주최 측이 말했듯, 우리 민족은 노래와 춤이 없이는 못 사는 민족이지요. 세계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들이 노래자랑을 통해 흥과 끼를 마음껏 과시하고, 또 노래자랑을 통해 한데 뭉치고, 네트워크를 만들며, 삶의 큰 활력소를 찾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분명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이번의 노래자랑 심사기준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가창력이 기본이 돼야겠지요. 그 다음 관중들에게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르려는 무대 자세 같은 인성, 자기만의 독특한 매력, 그리고 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감력 같은 것을 눈여겨 봐야겠지요.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참여가 중요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실력을 무대 위에서 마음을 다해 보여주자는 준비를 잘 하시면 됩니다. 거기에 자신의 매력을 더하면 금상첨화이구요. 참여자들에게 큰 무대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많지 못합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 가수의 꿈을 갖고 있는 많은 분들이 적극 참여를 해서 자신의 노래 실력을 알리고 자신의 꿈을 향해 한발자국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최근 몇 년간에는 대형 콘서트를 열지 못했지만 그동안 14회의 개인 콘서트를 개최할 만큼 중국 가요계에 남긴 그의 족적은 우리가 다시 돌아볼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진한 인간애가 점철된 콘서트와 거장의 품격

최경호 가수에게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콘서트는 어떤 무대였을까? 어느 하나 소중하고 벅차고 기억에 남는 콘서트들이었겠지만, 가수 생애 30주년을 맞이해 2015년 9월 24일 베이징 21세기극장에서 개최한 ‘동방의정(東方情)-최경호 음악회’가 그중 하나이다. 중국동방연예그룹에서 주최하고 북경의 여러 조선족 단체와 전국 조선족기업가들의 후원하에 개최된 그 독창회의 주제는 ‘사랑과 효도, 정’이었다. 

“최경호, 하면 ‘엄마 생각’을 부르는 가수로,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가수로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 음악회도 어김없이 전국 각지의 노인 800여 명을 초대해서 ‘효도’하는 음악회로 주제를 잡았다. 그 전날에는 본인이 지원금을 내서 ‘전국 조선족 노인 장기자랑’을 펼쳐 노인들의 문화생활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날 무대 프로그램은 정말 신경을 써서 꾸몄다. 그의 성장 스토리를 위주로 ‘효도, 사랑, 정’을 주선율로 했으며 전통과 현대 음악과 무용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무대를 구상했다. 

그 콘서트 총연출을 맡은 베이징미인송미디어유한회사 오향옥 사장은 무용극 ‘천지전설’, 대형가무 ‘영원한 기념비’, ‘세월의 메아리’, ‘꿈의 아리랑’ 등을 창작한 저명한 감독으로 최경호 가수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최경호는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우리 민족의 가수로 성장했다. 부모님들은 그에게 가수의 재능을 주었고 대자연은 가수의 꿈을 키워주었다. 최경호의 노래를 감상하노라면 저도 모르게 함께 웃고 흐느끼고 몸부림치다가 가수와 함께 정열의 도가니에 빠지게 한다.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바로 정(情)이다. 정은 최경호 음악 생애의 그래프이고 그의 노래의 영원한 원동력”이라며, “최경호 가수는 정이 넘치는 효자형 가수로서 이번 음악회는 효에 대해 최경호씨의 마음속에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아버지의 사랑, 하늘가에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고만 있을 것 같은 어머니의 다함 없는 사랑, 일구월심 어화둥둥 부부 사랑, 대를 물려주는 자식 사랑, 언제나 끈끈한 맥을 이어가는 고향 사랑, 손도장을 찍으며 영원을 맹세하던 친구 사랑, 촛불인 양 자신을 헌신하며 제자들을 키워가던 스승들의 사랑…을 주제로 한다. 이것이 바로 역경을 뚫고 우리 민족의 저명한 가수로 우뚝 솟을 수 있는 구심점이다. 따라서 효는 윗세대로부터 아래 세대로, 아래 세대로부터 윗세대로 이어가는 우리 민족의 우량한 미풍양속으로서 이번 최경호 음악회의 테마가 되는 근원”이라고 밝혔다. 

콘서트의 총기획을 맡은 이춘일 베이징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도 이런 평가를 했다. “최경호 씨는 유명한 가수이지만 항상 소박하고 효도하며 사회에 환원하는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습니다. 이번 콘서트는 노인들을 모시고 효도를 주제로 하기 때문에 전국의 많은 조선족 기업가들의 지원을 받게 됐지요”
최경호는 가난한 학생이나 독거노인에게 기부하면서 자선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6년 하얼빈시 조선족예술관 주최로 개최된 ‘최경호 음악 콘서트’에서 자신의 수익금 전부를 흑룡강성 오상시 사범학교에 기부했다. 1998년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열린 ‘이재민 돕기 최경호 콘서트’에서 모금된 200만 위안 전부를 재해구에 보내주어 국가재해구제사업 선진 개인으로 선정됐다. 그리고 2003년 연변에서 열린 ‘우애의 손 내밀기(伸出友爱之手) 최경호 개인콘서트’에서 최경호는 수익금 전부를 연변지구의 가난한 학생 1,248명에게 기부했다. 그중에는 그해 대학 신입생 215명도 포함돼 있었다. 현재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사랑을 전달하고 가난한 학생과 독거노인을 위해 300만 위안 이상을 기부했으며 랴오닝성(辽宁省) ‘사랑의동주재단’으로부터 ‘사랑의 이미지 대사’란 칭호를 받았다.

2018년 5월 13~14일, 어버이날을 맞이해 베이징 국도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개최한 ‘사랑해요 엄마-최경호의 영원한 사랑 콘서트’를 예로 들어 보자. 그 콘서트는 “그리움, 격려, 감사의 3개 장을 통해 모래 그림, 춤, 영상, 중창 등 다양한 예술 형식을 융합하여 아름다운 노래, 감동적인 이야기, 애틋한 고백으로 깊고 따뜻한 사랑의 찬가를 선사했다”고 보도됐다.  

음악회는 국가 1급 감독이자 유명한 감독인 탕원쥐안(唐文娟)이 총감독을 맡았고, 청년 작곡가 멍커(孟可)가 음악감독, 국가 1급 무용미디자인 양예담(楊睿擔)이 무대디자인, 국가 1급 무대디자인 자오바오충(趙保忠)이 음향, 국가 2급 무대디자인 허샹(賀翔)이 각각 음향·조명디자인을 맡는 초강력팀을 내세웠다. 모래화 디자이너 원보룡(袁寶龍), 옌볜 가무단 조선족 성악가 김선희·김학준, 장고춤 공연예술가 마샤오링(馬曉玲), 한국인 음향가 강승희도 초청돼 최고의 감독과 스태프들로 구성됐다. 

음악감독 멍커가 만든 주제곡 ‘사랑해요, 엄마’는 프랑스, 러시아, 조선 등의 음색과 가락으로 어우러진 최경호 가수를 위한 맞춤곡이 됐다. 또 ‘촛불 속의 엄마’, ‘뿌리에 대한 푸른 잎사귀의 사랑’, ‘엄마의 키스’, ‘은정(恩情)’ 등 명곡을 편곡했다. 멍커는 “음악회에서 밴드가 반주하고, 곡을 연주하며, 분위기 변화를 조절했다. 외음을 그린 성악은 완만한 바이올린곡과 은은한 피아노 소리, 최경호의 애틋한 고백이 더해져 그리움, 앙양(昂揚), 감동 등 다양한 정서를 풍성하게 구현했다”고 밝혔다.

탕원쥐안(唐文娟) 총감독은 “모성애는 영원한 주제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부드러운 곳이다. 우리는 다른 예술 표현 형식을 사용하여 모든 세부 사항을 진정으로 다듬는다. 프로그램 기획부터 무대 연출까지 시공간을 초월한 편지로 진한 그리움을 시작하며 관객 한 명 한 명이 몰입해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쑹관린(宋官林) 중국동방연예그룹 회장은 “최경호 콘서트는 2018년 동방가무단의 일지화(一枝花)인 국도(國圖)음악시즌의 첫 공연으로, 업계 안팎의 많은 관심과 함께 많은 스폰서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동양의 미래 발전에 대한 보다 넓은 전망과 새로운 협력 모델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주최 측인 박걸 커시안그룹 회장은 “커시안그룹은 성장하면서 가난한 학생 지원, 독거노인 돌봄, 재해지역 지원 등을 잊지 않고 사회에 환원해 왔다. 최경호 콘서트의 주제인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바치는 일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건강봉사가 바로 우리가 살려야 할 사회의 긍정적 에너지”라고 말했다.

최경호 가수는 30년 동안 이렇게 ‘사랑으로 녹아있는 진진한 감정을 깊은 문화적 내공이 쌓인 자신만의 목청으로, 또 전문가다운 아티스트의 자세로 노래 하나하나를 부르면서’, ‘인간애’로 거장의 품격을 높였다.

한편, 중국동방연예그룹은 국가급 연예문화그룹으로 전국 문화체제 개혁의 시범 단위가 되어 3년 연속 ‘중국 문화기업 30대’ 칭호를 수여 받았다. 그 전신은 1952년에 설립된 중앙가무단과 1962년에 설립된 동방가무단이다. 중국동방연예그룹은 민족 특색과 국가 수준을 대표하는 국가중점예술표현단체로 중국 음악무용예술의 최고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해 12월 24일에 중국 동방연예그룹의 예술가들에게 답장을 보내 사회주의 문화강국건설에 새로운 공을 세우도록 격려하였다.

역경을 딛고 힘차게 부른 ‘사랑의 노래’

CCTV4 중문국제(中文國際)는 지난 2021년 3월 15일에 가수 최경호와 현재 중국가극가무원(中国歌剧舞剧院)에서 뮤지컬 배우로 있는 딸 최수려(崔秀丽)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회자 징이따안(敬一丹)은 “가수에 대해 말할 때 선율의 기복에 익숙해 있지만 인생의 기복도 겪을 수가 있다. 만약 부득이 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다면 이는 곧 인생의 슬럼프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가족은 그한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라고 서두를 뗀 후 최경호한테 질문했다. “당신의 중대한 시점에, 가족이 당신에게 건넨 가장 인상 깊은 말은 무엇이었지요?” 이에 최경호는 “‘우리 한집 식구들, 이제 다시는 갈라지지 말자’였다”고 대답했다. 

1972년 4월, 최경호는 중국 흑룡강성 목릉현의 어느 보통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9살 나던 해에 갑자기 아버지가 병사하였다. 그때부터 그의 어머니의 성격도 여러 방면에서 많이 변했다. 말도 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자주 눈물을 흘렸다. 바깥일 가무일 가리지 않고 여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어머니는 다 했다. 농촌에서 가을이 되면 초가집 이엉을 해야 했었는데 여자의 몸으로 무서움 없이 지붕을 타곤 했다. 닭과 돼지를 기르며 아주 강하게 살았다.  

이에 이웃들은 “여자 몸으로 혼자서 여섯 자식을 어떻게 기르겠느냐”며, 자식 한둘이라도 양부를 찾아 맡기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둘째를 가까운 이웃 촌의 남의 집에 보냈다. 그런데 맏이는 날마다 그 집 문 앞에 찾아가 동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놀다가는 저녁이 어두워져야 돌아오곤 했다. 양부는 더는 ‘친자매의 깊은 정을 떼놓을 수가 없어’ 둘째를 다시 돌려주었다. 그때부터 그들 식구는 더는 갈라지지 않았다. 
후에 최경호가 커서 군에 입대하게 되자 어머니는 특별히 기뻐했다. 그는 날마다 집에서 당시 유행했던 ‘다시 만나요, 어머니’란 노래를 연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흐뭇해서 “엄마가 그리 좋으냐”라고 물었다. 그때 속이 울컥하고 뜨거워지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진한 가족애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번에 사회자가 “후에 모종 원인으로 무대를 떠났을 때가 인생의 가장 큰 슬럼프에 빠졌을 때라고 볼 수가 있다. 당시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라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무대를 떠났을 때 나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고통은 남이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겁니다. 무대는 저의 밥통이었지요. 노래를 할 수가 없으니 이는 저의 애가 학교 가는 데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가정을 먹여 살리는 등 현실적인 문제의 벽에 부딪히게 됐지요. 그때는 기본 상 마음이 붕괴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2011년) 어머니마저 병사하셨기에 그 고통은 더욱 컸지요. 그 때문에 늘 우울해서 지냈지요. 사업과 생활상의 이중 타격으로 아주 큰 슬럼프를 겪게 됐습니다. 이로 인해 가족들은 큰 근심을 하게 됐고요.” 

이번에 사회자가 그의 딸한테 “당시 아빠는 어떤 모습이었는가”라고 묻자 최수려는 눈시울 붉혔다. “기억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침 6~7시쯤 일어나 일자리를 찾기 위해 면접 준비를 하느라 화장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제 방에 들어와 무얼 찾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어디로 가려고 그러냐? 미안하다. 더 쉬운 일을 시켜야 하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리고 나갈 듯하다가 멈춰서서 ‘정말 미안하다 수려야, 아빠는 네가 더 편한 생활을 하도록 돌봐줘야 하는데……. 그런데 넌 이제는 반드시 이런 문제를 스스로 풀어나가야 한다. 아빠가 미안하다’라고 말했어요. 그때 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그때부터 전 집에서 화장을 하지 않았어요. 살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좋은 결과만 보여주고자 신경을 썼지요. 제가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고 아빠도 차츰차츰 저의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지요.”

역경 속에서 가족은 이렇듯 서로에게 끈끈한 사랑의 힘이 됐다. 

최경호와 딸은 두 번 같은 무대에서 공연했다. 한번은 최수려가 15살 나던 해 평양 4.15예술절에 초대받아 갔을 때이고, 다른 한 번은 2015년 9월 24일 베이징 21세기 극장에서 국가문화부의 주최로 개최된 최경호 가수 인생 30주년을 기념하는 ‘동방의 정-최경호 음악회’에서였다. 두 번째 음악회는 감회가 남달랐다. 딸이 벌써 뮤지컬 배우로 성장해 ‘딸바보’ 뮤지컬을 연출하면서 부녀간의 끈끈한 정을 과시하는 가수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소재도 감독이 최경호 가수가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딸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찾았다고 한다. 

무대에서 최경호 가수는 딸과 함께 ‘인연’, ‘새타령’, ‘아버지의 축복’, ‘어머니 영상’, ‘재회’ 등의 노래를 불러 고향과 부모님, 스승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고스란히 녹여냈다. 

“음악회는 독창과 뮤지컬의 만남으로 최경호 가수의 인생 스토리를 무대화했고, 노래 ‘엄마 생각’은 수많은 관중의 눈물을 자극했으며,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니와의 대화로 펼쳐지는 ‘재회’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생아’는 최경호 가수의 효심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딸에게 전하며 문화예술을 대대로 전승함을 보여주는 뮤지컬 ‘딸바보’는 관중들에게 감동과 웃음을 선사했다”고 모 언론은 칭찬했다. 
최수려는 당시의 느낌에 대해, “어릴 때는 가수가 이렇게 힘든 직업인지를 몰랐다. 나는 아버지가 쉽게 돈을 버는 줄 알았다. 내가 연극배우로 데뷔한 뒤에야 가수의 고달픔과 그 고초를 체감하게 되었다. 내가 첫 공연 리허설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무대에 오른 후 아버지의 속마음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자선사업을 위해 공연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나는 연극을 하다 보니 아버지의 인지도를 잘 몰랐다. 이번 공연과정에 아버지 팬들의 박수갈채 소리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관중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아버지의 성공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밝혔다. 

최경호 가수는 이처럼 어머니로부터 ‘삶의 어려움을 견인불발의 정신력으로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면서 노인을 효도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불우 이웃을 돕는 미덕’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좀처럼 풀기 어려운 응어리가 가슴에 맺히게 됐다. 엄마 생전에 ‘사랑해요’란 말 한마디 못 한 것, 동분서주하며 공연하느라 병든 어머니 곁을 지킬 시간이 없었던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야 병상을 찾아 모자가 처음으로 조선족 민요를 함께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유품을 챙기다가 어머니가 간직하고 있던 금장(领章)과 모표(帽徽)를 발견하고, 또 “엄마와 특별히 친하게 찍은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자식이 잘나가고 있는 ‘징표’들을 가슴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노래와 선행(善行)은 거의 조선민족의 미풍양속인 효(孝)를 주제로 효도와 사랑의 스토리로 표현되고 있었다. 무대에서 ‘사랑해요, 엄마’라고 고백하는 사내는 어머니에게 못다 한 사랑을 세상과 나눔을 통해 사랑의 참뜻을 깨닫고, 또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중국 성악계 정상에서 부른 노래-‘사랑해요, 엄마’

어쩌면 최경호의 이런 소박하고 인의적인 인격과 충과 효를 중시하는 품성에 반해서인지 모른다. 1992년 그는 저명한 작곡가 구젠펀(谷建芬)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돼 성악 인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여기서 잠깐 돌이켜보자. 최경호 가수는 결코 순탄하지 않은 예술의 길을 걸어왔다. 어릴 적부터 가수가 되려는 꿈을 꾸었지만, 궁핍한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예술학교의 꿈을 접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1981년에 다행히 군에 입대, 연대 생활에서 그는 전우들의 음악지도사로 활약했고, 군민연환모임(军民联欢会)이 있을 때마다 열창을 해서 인기몰이를 했다. 사단에서 조직하는 문예 콩쿠르에서도 여러 번 상을 탔었다. 

1984년 군에서 제대하자 당시 중국의 호적 문제로 본적지인 목릉 현 농촌으로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수의 꿈을 접을 수 없어 꾸준히 노력한 결과 그해 12월에 열린 현성문예콩쿠르에서 ‘전사의 제2고향’과 일본 홋가이도 민요 ‘그물 당기기(拉网小调)’ 등을 불러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당시 현 문화국 국장의 특별 인가로 현문공단에 입단했다. 그로부터 그는 목단강 지구 순회공연에 나서는 한편 성급 콩쿠르에도 수차 참가하여 음악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흑룡강성 조선족예술관 성악지도로 발탁되었다. 그 후에 뜻하지 않은 인생 굴곡도 겪게 됐다. 예술에 대한 그의 추구와 야망을 알고 모기업에서 저들의 예술단에 입단하도록 유혹했던 것, 그런데 그들의 목적이 예술과는 별개인 것을 간파하자 그는 1992년에 사표를 내고 결연히 하얼빈시조선족예술단으로 돌아왔다.  

1993년에 그는 구젠펀 작곡가의 알선으로 홍콩에서 ‘93중국풍’으로 명명된 대형 공연에 참가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때 그는 중국의 10대 작곡가로 선정된 쉬페이둥(徐沛东) 선생을 알게 되었으며, 곡건분 여사와 서패동 선생으로부터 삶의 자세와 인생의 철리를 배우면서 자신의 노래 실력을 한층 업그레이드할 수가 있었다. 

구젠펀(谷建芬)은 ‘젊은 친구들 와서 만나요(年轻的朋友来相会)’, ‘촛불 속의 어머니(烛光里的妈妈)’ 등 유행곡을 작곡했고, 제11기 중국음악금종상 폐막식에서는 ‘종신성과상’을 받을 만큼 걸출한 작곡가였다. 쉬페이둥 선생도 저명한 작곡가로 후에 중국문연부주석 및 중국음악가협회 부주석을 담임한 막강한 실력파였다. 

스승 구젠펀 선생님과 최경호 가수

두 분의 주선으로 최경호 가수는 중국 영화 및 TV드라마인 ‘조상지(赵尚志)’, ‘우리의 아빠와 엄마(咱爸咱妈)’, ‘삼국연의(三国演义)’, ‘서유기 속집(西游记续集)’, ‘평화연대(和平年代)’ 등 30여 편의 영화 및 드라마의 주제가 혹은 삽입곡을 열창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1994년 CCTV판 ‘삼국지연의’는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으로, 1억7,000만 위안을 투자한 이 블록버스터는 방영일부터 수많은 시청자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와인 속의 장미’란 저자는 기사를 통해 이에 감탄을 쏟아냈다. “CCTV판 ‘삼국지연의’의 많은 곡 중 가장 익숙한 것은 편두 곡 ‘장강의 물결 줄기차게 동으로 흐른다(滚滚长江东逝水)’와 편두곡 ‘역사의 하늘(歷史天空’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삼국지에서는 한 가수가 이 극을 위해 총 세 곡을 불렀는데, 노래의 숫자에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는 아마 모두가 잘 아는 류환(劉欢)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조선족 가수 최경호이다… 최경호가 부른 세 곡은 ‘민득평안천하안(民得平安天下安)’, ‘당양상지이심단(当阳常志此心丹)’, ‘강상행(江上行)’으로, 각각 ‘백성을 데리고 강을 건너다(携民渡江)’, ‘단기구주(单骑救主)’, ‘단도도회(单刀赴会)’란 세 장의 주제곡에 해당한다. 최경호의 지성적인 목소리에 관객은 순식간에 극 속으로 이끌려 갔고, ‘민득천하안’은 관중들로 하여금 눈물을 훔치게 했으며 또 ‘당양상지이심단’은 관객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고, ‘강상행’은 관우의 지혜와 담력을 느끼게 했다…….” 

최경호 가수는 당시 정경을 회상하면서 “삼국연의에 나오는 유비, 관운장, 장비, 조자룡 등의 비장한 영웅 형상이 떠올라 늘 가슴이 울먹거리고 정수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하곤 했다”고 말했다.

‘와인 속의 장미’는 “최경호는 삼국지 이후 관객들의 귀에 익은 노래들을 많이 불렀는데, 그중에서도 ‘아버지(父親)’와 ‘통천대로 넓고 넓다(通天大道宽又阔)’가 가장 유명했다. ‘아버지’는 1990년대 최경호가 부른 노래로 정감이 진지하고 입에 잘 올라 관객들의 마음을 쉽게 찾아들게 했다. ‘통천대로 넓고 넓다’는 드라마 ‘서유기 속편’의 주제곡으로 ‘방금 요괴 몇 놈을 잡았는데 또 마귀 몇 놈을 잡았네(刚擒住了几个妖 又降住了几个魔)’라는 가사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이렇듯 최경호 가수는 갖은 역경을 딛고 ‘명실에 부합되는 중국의 성악대가’로 부상했다. 14억 대륙에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는 자신의 노래 실력으로 중국 4대 명작에 속하는 ‘삼국연의’, ‘서유기’ 등과 같은 드라마의 주제곡을 부를 수 있었다. 1992년 전국 ‘소수민족’ 성악 콩쿠르에서 통속가요 부문 1등상을 수상했을 때였다.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연고로 동생이 대신 상패를 타러 갔을 때 누군가 곁에서 “왜 조선족 가수에게 일등상을 줬는지 모르겠다”고 비꼬았단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최경호 가수는 개의치 않고 웃어넘겼다. 그만큼 중국 가요계도 경쟁이 치열하다는 방증이다.

최경호 가수는 중국 성악계의 정상에 올랐지만 결코 스승을 잊지 않고 지금도 깎듯이 모시고 있다. 그는 “두 선생님(구젠펀, 쉬페이둥)은 제 예술 인생의 계명등(启明灯)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라고 감개무량해서 말했다. 

2018년 5월에 개최한 ‘사랑해요 엄마-최경호의 영원한 사랑 콘서트’를 관람한 구젠펀 작곡가(당시 83세)는 무대에 올라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바로 나야’, ‘촛불 속의 엄마’, ‘뿌리에 대한 푸른 잎사귀의 사랑’, ‘엄마의 키스’ 등 노래는 구젠펀이 작곡한 명곡이었고, 그것을 제자가 선곡해서 불러 관객들의 눈물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최경호 가수는 무대에 오른 구젠펀 작곡가를 가볍게 포옹했다. 특별히 마련된 섹션에서 그는 관중석을 향해 이렇게 큰 소리로 고백했다. “저한테는 운이 좋게도 두 분의 엄마가 있습니다. 한 분은 저를 낳아주시고 어른으로 키워주신 엄마이고, 또 한 분은 예술계에서 저를 성장시킨 구젠펀 어머니입니다. 구젠펀 어머니는 묵묵히 저를 배려해주셨고, 사심 없이 지식과 경험을 전수해 주셨으며, 제가 인민 예술가가 되고, 인민을 위해 노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젠펀을 향해 “사랑해요, 엄마”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에 힘입어 객석에서도 큰 소리로 모두가 “사랑해요, 엄마”하고 따라 외치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글을 맺으며


코로나19로 극심한 정체기를 겪어온 우리는, 이제 곧 정년퇴직을 앞둔 최경호 가수의 다음 행보를 기다린다. ‘효와 사랑과 정’으로 자신의 예술 인생을 수놓아온 최경호 가수의 앞길에 더 큰 축복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글은 최경호 가수에 대한 취재와 그동안 인터넷에 발표된 기사들을 종합해서 쓴 인터뷰 르포이다. 사진은 가수 측에서 제공했다. 가끔 문구 인용이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양지바란다. 감기 몸살로 아픈 몸에도 취재에 협조해준 최경호 가수에게 감사를 드린다.   


취재 / 이동렬: 서울 동북아신문 사장


이동렬 프로필


•중국 길림성 서란시 출생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 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룡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現 서울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사장
•2018년 10월~現 중국신문(中國新聞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現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동포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중국작가협회 회원 •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장편소설집: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중단편소설집: ‘눈꽃서정’, ‘토양대’ 등 4부 출간

수상: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학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소설 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시상: 중국동포지성인상, 고마운한국인상,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崔京浩出生在穆棱县河西公社普兴大队一个普通的农民家庭。
现任中国东方歌舞团,国家一级演员 

个人获奖                                         
                                         
1992年在全国“五洲杯”青年歌手电视大奖赛中荣获通俗组3等奖。
1992年在全国“歌王歌后”声乐比赛中荣获通俗组歌王奖。
1992年在全国“华鑫杯”声乐比赛中荣获通俗组一等奖。
1992年在全国“少数民族”声乐比赛中荣获通俗组一等奖。

电视剧                                         
                                         
《三国演义》 《和平年代》《一代廉吏于成龙》 《陈真新传》 《咱爸咱妈》《孙武》 《谷穗黄了》 《走入欧洲》等四十多部

个人演唱会                                         
                                         
1996年在哈尔滨朝鲜族艺术馆的帮助下成功地举办了第一个个人演唱会,并将本次演唱会的所有收入全部捐献给黑龙江省五常师范学院。

1998年在黑龙江省牡丹江市成功举办了赈灾捐款个人演唱会,将200万收入捐献给灾区,荣获国家科工委抗洪救灾先进个人称号。

1998年受大连民俗节的邀请举办了个人演唱会。

1998年在家乡穆棱县举办了个人演唱会。

1998年在延吉球迷协会的邀请,举办了个人演唱会。

2003年在朝鲜平壤为庆祝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国防委员长金正日诞辰61周岁,举办了4场公演个人演唱会,受到了朝鲜人民的称赞。这次演唱会也为中朝人民的友谊促进做出了贡献。2003年8月延边举办了个人演唱会——“伸出友爱之手”崔京浩捐资助学大型义演。将全部的收入捐给延边地区因贫困失学的学生1248人,其中215名本届大学新生。


从1996年来,共举办了14场个人演唱会。每一个演唱会的背后都有一段充满爱心的、感人的故事。每一个演唱会都是崔京浩对自己深爱的热土的奉献。正如他本人所说“我出生在农民的家庭,是这片黑土地赐予了我艺术的生命。我应该去回报我的 '母亲',这种回报事永远不会停止的”!

2023년 세계조선족노래자랑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공동주최 단체 리스트

・大連延辺商会
・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発展基金会
・在日中国朝鮮族経営者協会
・World-OKTA千葉支会

협찬 단체 리스트

・日本琿春同郷会

협찬 기업 리스트

・全日華不動産協会 金山張虎会長
・グローバル一通株式会社 権虎軍社長
・株式会社JCBC 厳田哲社長
・株式会社ケネス 黄海東社長
・株式会社G&T 朴春花社長
・T&C株式会社 金仁吉社長
・株式会社BTU 朴春益社長
・創権テック株式会社 金東陳社長
・株式会社ベストエンタープライズ 李星浩社長
・延辺料理千里香 金秋月社長
・三口一品キムチ 李星社長

협력 미디어

・SHIMTO Media 在日朝鮮族メディア
・潮歌网 朝鮮族新闻网
・东北亚新闻

개인 협찬 리스트

・許永洙:全日本華僑華人社団連合会 常務副会長/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名誉会長
・馬洪哲: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会長/在日朝鲜族足球协会 名誉会長
・李龍植:株式会社アジアンエクスプレス 社長
・崔永哲:大連延辺商会 会長/大連朝鮮族企業家協会 名誉会長
・崔雨林: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副会長/株式会社MARUEIグループ 取締役研究所長
・張京浩:新日本美術協会 審査委員/延辺大学日本校友会 名誉会長
・金光林:新潟産業大学 教授/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発展基金会 理事長
・金哲洙:日本農業新聞 論説委員/全日本中国朝鮮族連合会 事務局長
・金万哲:華人IT企業信用協会 会長/在日中国朝鮮族経営者協会 名誉会長
・全虎男:在日中国朝鮮族経営者協会 会長/株式会社ウィッツテクノロジー社長
・崔雲鶴:日本琿春同郷会 会長/株式会社ジーオー・ジャパン

상품 협찬 리스트

・魯紅梅: 蒲谷漢方研究所 所長/健康茶 50箱

※협찬을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리스트에 추가드리지 못한 분이 계시면 속히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
【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인터뷰 기사】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권호군 회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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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기에 멈추지 않는다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권호군 회장 인터뷰-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권호군 현임회장
세상에는 꿈을 꾸는 사람과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꿈은 아무나 꿀수 있지만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건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본의 경영의 신 마츠시다 고노스케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예쁜 벚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한다” (きれいな桜が咲くために必要なものは冬の寒さ). 다시 말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지고 위기앞에 좌절하고 무릎을 꿇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뛰는 도전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나면 마침내 따뜻한 봄날에 고운 꽃을 피워낼수 가 있다. 그렇게 꿈을 이뤄낸 자는 또 다시 누군가의 꿈이 된다.
오늘은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현임회장 및 월드옥타 치바지회 수석부회장을 겸임중인 글러벌일통 주식회사 대표 권호군 회장의 가슴 뛰는 꿈들과 그 꿈들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던지는 거침없는 도전장에 대해 엿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한다.

1.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르다-꿈을 쫓아 일본으로의 비행을 시작하다

권회장은 1973년 1월 30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태여났다. 마라톤선수의 아버지와 작곡가 어머니 슬하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밝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유년시절에 대해 질문을 하였을 때는 어렸을 때부터 지니게 된 긍정적인 마인드가 리더가 된 지금 실패앞에서도 앞을 내다보며 적극적인 자세로 도전하며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학생시절에는 단거리 달리기에 두각을 드러내 육상대회에서도 활약을 했다. 공부만이 출세라던 그 시절의 다소 보수적인 현실과 비교했을 때 이는 신선한 경험담이여서 권회장의 인간미가 더 느껴졌던 부분이였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학업에 전념하여 연변대학에서 계산기및응용학과를 전공하게 되였다.

1990년대의 중국을 살펴보면 개혁개방정책이 한창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광주나 심천같은 개혁개방의 바람을 가장 먼저 맞은 연해도시에로의 진출의 붐이 일었고, 한국기업 등 외자기업의 중국진출도 활발하게 진행되였었다. 그러한 시대배경속에서 권회장은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길에 진출한 한국계 소프트웨어 계열사에 입사해 일을 배우게 되였다. 하지만 연길이라는 무대는 권회장의 젊은 패기와 뜨거운 꿈을 담기에는 다소 협소하게 다가왔었다. 이에 갈증을 느낀 그는 과감하게 대도시인 북경으로 향하게 되였다. 북경에 들어선 그는 다시 전공을 살려 일본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의 북경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회사에는 일본인 사원들도 많았고, 클라이언트도 일본에서 자주 방문을 오는지라 자연스레 일본문화와 일본사람들을 접촉하게 되였다. 그렇게 권회장은 자연스레 우리와는 사뭇 다른 일본문화와 그들의 프로정신을 경험하게 되였다. 

권회장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만큼 일본사원들의 프로정신은 실로 놀라웠고 일에 대한 섬세함 또한 뛰여났었다고 한다. 몇수 앞을 내다보며 문제점을 찾아내 미리 예방대책을 하는 등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는 현실속의 자신과의 차이를 느끼게 되였다. 이는 곧 권회장의 호기심과 학구열을 불러일으키게 되였다. 구경 무었때문에 일본이 중국보다 앞서고 세계에서 인정하는 경제강국이며 그들의 장인정신도 이토록 뛰여난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배우고 싶다는 꿈도 그렇게 부풀어가게 되였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2002년 어느 봄 날, 북경지사의 일본인 사장의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면서 권회장은 마침내 활주로를 박차고 일본으로의 비행을 시작하게 되였다. 

2.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기대해왔던 일본이였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었다. 우선 언어장벽이였다. 권회장의 제1외국어가 영어였던지라 일본어는 낯설고 벅찬 존재로 다가왔었다. 클라이언트의 회사에 파견되여 일을 해도 언어의 장벽은 너무나도 단단했다. 하지만 시작을 하면 꼭 결과를 보고야마는 성격의 소유자인 권회장은 단단한 언어의 장벽에 대해 거침없는 펀치를 날렸다. 주말이면 시청(시야쿠쇼) 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평일에도 짬을 내어 일본어공부를 하면서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애를 썼었다. 그렇게 5년동안 실력을 갈고 닦은 결과, 권회장은 언어뿐만아니라 비지니스 등 여러면에서 실력과 경험, 인맥을 쌓고 역량을 확장하게 되였다. 

5년동안 IT업계에 몸 담그며 역량을 확장하다보니 업계의 문제점 및 개선방향 등을 발견하게 되였다. 인재에 대한 수요 즉 기업의 채용열기는 뜨겁지만 취업시장의 인재공급이 그 열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였다. 권회장은 이제까지 확장해온 역량과 노하우를 발휘하여 회사를 설립하여 인재부족에 직면해있는 IT업계의 노동시장에 공헌하게 되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였던 것일가, 회사를 설립한지 2년도 되지 않아 리먼쇼크의 검은 그림자가 열도전체를 순식간에 삼켜버리게 되였다. 아니나 다를까 권회장도 그 폭풍에 휘말리게 되였다. 심각한 불황이 이어지면서 인재에 대한 수요도 줄어드는 탓에 직원들은 일거리가 없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은행대출도 어려워져 직원들의 임금도 미뤄지는 자금난에까지 시달리게 되였다. 금융위기로 인해 호황기였던 업계가 순식간에 불황기로 전락하며 파산의 변두리에 임박했음에도 변하지 않은게 하나 있었다. 권회장이 리더라는 사실이였다. 그는 자신도 힘든 시기임에도 직원들에게 사비를 털어서라도 임금을 지급하겠으니 희망을 잃지 말고 임금을 지급하는 동안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직원들도 안정을 찾고 권회장도 일전에 인연을 맺었던 도시바 계열사에서 다시 일하게 되면서 큰 위기를 넘기게 되였다. 

3. “호황도 좋지만 불황은 더 좋다(好況よし、不況さらによし)”

권회장은 큰 위기를 넘기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고, 앞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였다. 조선족만의 강점을 발휘해서 일본사회에서 생존할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가에 대해서 말이다. 일본의 경영의 신 마츠시다 고노스케의 자서전에는 “호황도 좋지만 불황은 더 좋다. (好況よし、不況さらによし)”라는 말이 있다. 즉 불황은 위기로 인해 출발점으로 돌아가 뜻을 바로 잡고, 재점검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객관적으로 판단할수 있는 찬스를 주기 때문이다. 위기앞의 권회장이 그러했다. 그렇게 권회장은 재점검을 통해 위기와 불황기에서 발상의 전환점과 기회를 발견하게 되였다.

우리만의 강점을 생각하고 연구하던 그는 백엔숍, 전자제품가게 등 여러 상가들에 눈길을 돌리게 되였고 일용품이 거의 다 중국산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였다. 즉 언어우세와 자원우세를 충분히 이용할수 있는 길이 눈앞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였다. 권회장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이용해서 전자상거래가 금방 시작된 일본의 시장의 가능성에 투자하게 되였다. IT로부터 수입무역에 방향을 옮기고 중국물건의 수입과 판매로 업무방향을 돌리는 변혁의 길에 과감히 뛰여들게 된 것이다.

2010년 즈음에는 아이폰이 기세좋게 시장점유율을 높혀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보완재인 스마트폰케이스의 수요량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장성을 보아낸 권회장은 중국심천을 방문해 직접 시장을 돌면서 일본시장에 수출할 스마트폰케이스를 발주하고 일본에 돌아와 전자상거래를 시작하게 되였다.
하지만 예상외로 시장반응은 미지근했다. 시장성은 분명히 있는듯 하였으나 구경 어디에서 실타래가 꼬였는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IT업계에 종사해오던 그에게 물건을 팔고 사는 무역은 생소한 영역이라는 현실의 장벽을 느끼게 되였고,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였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고난을 견뎌야 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권회장은 무역업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권회장은 월드옥타 한인무역협회 치바지회 강연회에 참가해 일본유통업의 시장성과 미래성, 일본의 중국상품 의뢰성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들을 요해하게 되였다. 2012년에는 월드옥타 차세대 무역스쿨에 참가해 무역에 대한 지식을 파트너들과 함께 배우게 되였고, 마케팅에 대한 강연도 듣게 되였다. 당시 들었던 월드옥타 이영현 명예회장님의 강연은 지금까지도 권회장에게 인상깊게 박혀있다고 한다. 한국의 슈트케이스를 카나다에 수출해서 우여곡절끝에 성공을 거둔 경험담은 당시의 권회장에게 인상깊게 다가왔고 좌절을 맛본 그에게 다시금 도전하고 싶은 신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체계적인 공부를 거치고 나니 뜨뜨미지근한 시장반응의 원인도 하나 둘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현지에 가서 직접 디자인을 고르고 재료를 검토하는 수고와 노력은 했다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주관적인 감각과 생각에 의한 것일뿐, 일본시장이 원하는게 구경 무엇인지에 대한 사전조사가 없었음을 깊이 반성하게 되였다.

그렇게 일본시장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한 탐색과 연구의 리서치가 시작되였다. 일본의 전자제품성지인 아키하바라에서 시장조사를 하고 백화점이나 점포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는 손님들의 행동패턴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락텐이나 아마존에서 잘 팔리는 카테고리의 랭킹을 검색하고 회사에서 직원들과 검토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일본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의 의견과 안목이 중요하기때문에 일본인사원을 적극 채용하여 그들과 협업하게 되였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도전한 결과, 시장반응은 뜨거웠고, 무역사업은 정상궤도에 진입을 했고, 회사규모도 확장하게 되였다. 창업초기에는 오피스의 절반을 창고로 쓰던데로부터 사업규모가 커짐에 따라 창고면적을 확장하게 되였다. 또한 기성제품을 수입하던데로부터 직접 공장에 주문제작하는데로 사업 확장을 하게 되였다. 그 이유는 중국산 기성제품은 중국시장에 팔기 위해 제작된 제품으로 일본시장에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때문에 일본소비자들에게 맞는 제품을 사전조사를 통해 충분히 알아보고 디자인을 거쳐 심천공장에 주문제작할 필요성이 있기때문이다. 그렇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 뜨거운 시장반응과 더불어 위기로부터 시작한 무역사업은 큰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매출도 올라가고 수입상품의 카테고리도 늘어갔다. 스마트폰케이스에서 시작해 지금은 가전제품이나 가구 등 부피를 차지하는 물건들이 늘어가고 있다. 또한 창고가 필요한 고객에게 창고를 임대하는 방식으로 재고회전율을 높였고, 중국의 심천과 이우에 물류창고를 두어 수입할 물건을 중국 물류창고에 집결정리시켜 한번에 일본에 수입하는 등 사업의 생산성도 높이고 있다. 이는 편의성은 물론, 코스트면의 경감으로 인해 수익율을 높힐수 있게 되였다.

지금은 이바라키현 도리데시에 1만평방메터의 창고를 가지고 있으며 창고임대, 물류운송, 도매소매 등을 진행하며 손님들의 물건 대리발송과 대리판매 등도 같이 진행하고 있다.
시작한 일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일은 권회장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일단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번복하는 일이 없이 결과를 내려고 한다. 가령 성공확율이 낮은 일일지라도 일단 도전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오직 그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 한다고 한다. 인터뷰 중 가장 인상깊었던 말은 “모든 일은 오직 시작과 결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도 포기(中途半端)란 절대 금물이지요. ” 라는 말이였다.
그러한 그에게 경영철학에 대해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하는 일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창출하는 일입니다. 짧게 보면 어떻게든 수익을 내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길게 보면 사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공존공영(共存共栄)의 가치관이지요. 거래처와의 수익분배에서 윈윈의 가치관을 잘 지키면 신뢰관계를 쌓을수 있으니, 금전관계는 다소 느슨하게, 인간관계는 조금 더 긴밀하게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4.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

권회장은 처음에 일본에 왔을 때는 5년만 분투하고 귀국하려고 계획했었는데, 살다보니 일본사회에 적응하게 되고 또한 여기서 우리 민족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면 잘 살아갈수 있는 좋은 환경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였으며 이젠 일본에 마음을 붙이고 살게 되였다. 그렇게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은만큼 무역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시간적이나 자금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면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생활과 사업의 무대를 제공해주었던 지역사회에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일시적으로 마스크 부족의 대란이 일어나게 되였고 권회장은 무역의 우세를 발휘해 중국공장에서 생산한 마스크를 대량적으로 일본에 수입해 마스크 부족에 시달리는 이바라키현에 기부하게 되였다. 또한 코로나시국에 소독액 공급이 부족한 현황을 보아내 매년 교육위원회에 500미리 소독액을 2만병씩 기부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일상용품 등을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기부하고 있다.  
사진 왼쪽으로부터 유명학, 권호군 회장, 일본 이바라키현 도리데시 藤井信吾 시장 (이바라키 신문에 실린 기사)
사진 왼쪽으로부터  유명학, 권호군 회장, 大井川和彦 茨城県知事, 中村県議員
사진 왼쪽으로부터 中村県議員, 유명학, 先﨑光 茨城県那珂市長, 권호군 회장, 문걸

5. 일본에서 시작하는 백의민족의 꿈-문화회관의 설립

정든 고향을 떠나 일본이라는 섬 나라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다 보면 고향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쌓여지기 마련이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하여서도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본의 지역사회뿐아니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단합과 협업에도 기여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였고, 그렇게 일본조선족경제교류협회와의 깊은 인연도 시작되게 되였다.

2019년, 권회장은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 주최한 도쿄포럼 및 세계조선족문화절에 참가하여 우리 민족이야말로 세계 어디에서 살아도 민족의 얼을 그대로 보유하며 살고 있는 우수한 민족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였다. <플랫폼을 구성하여, 조화롭게 발전하자>라는 취지는 권회장의 마음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그 후,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행사에서 지금의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金山张虎 명예회장과 만나 친분을 쌓게 되였고, 金山张虎 명예회장의 우리 민족에 대한 애착심과 우리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의지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되였으며, 金山张虎 명예회장으로부터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의 회장 제안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에 힘 입어 제2대 회장을 이어받게 되였다. 그렇게 우리 조선족의 경제와 문화에 힘을 이바지해야겠다는 가슴 뛰는 꿈이 부풀어나게 되였다.

2022년 11월 3일, 이바라키현 도리데시에서 일본조선족문화회관 창립식이 열렸다. 문화회관은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서 기획하고 권회장이 사비까지 투자하면서 설립한 것이다. 일본에는 우리의 쉼터가 마련되지 않아 문화행사를 할수 있는 변변한 장소가 없음에 고뇌를 느끼고, 문화회관설립을 제안하게 되였고, 金山张虎 명예회장, 최우림 부회장, 장경호 고문을 포함한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의 관계자분들의 협력으로 성공적으로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권호군 현임회장 (왼쪽 사진), 金山張虎 명예회장 (오른쪽 사진)
그에게 있어 조선족은 생각만 해도 항상 뿌듯한 존재이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살길을 찾아서 중국땅에 발붙이고 굳세게 살아온걸 생각하면 조선족으로써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향을 등지고 유목민족처럼 떠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어 가끔은 서러울 때가 있지요.  그래서 문화회관이 재일조선족들의 서러움을 달래줄 고향집 같은 존재가 되였으면 합니다. 일본땅에서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할때면 제일 먼저 저희 경제문화교류협회를 떠올려주시고, 망설임없이 우리 문화회관을 찾아주시면 밥 한끼라도 따뜻하게 대접하며 도움을 줄수 있는데까지 힘 다해 도와드리는 것으로, 모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문화회관에서는 한복 전시나 김치 담그기, 찰떡 만들기 노래자랑, 한글 배우기 등 우리 문화와 전통을 지켜가는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도서도 가득 채워 책향기와 은은한 커피향으로 심신의 위로를 느낄수 있는 모두의 쉼터로 사용되였으면 한다. 또한 권회장은 문화교류뿐이니라 비지니스에 도움이 될수 있게 여러 제품을 전시하고 바이어지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더 많은 비지니스 기회를 창출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취재/글 김은혜(金恩恵)


김은혜(金恩恵) 프로필


•吉林省延吉市 出身
•天津大学 経済・管理学部 金融学専攻
•早稲田大学大学院 経済学研究科 修士課程卒業
•パナソニック株式会社 経理企画部 入社

인터뷰 소감


너무 좋은 기회로 권호군 회장의 인터뷰 기사 제작에 참여하게 되였다. 여러차례의 온라인교류를 통해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였다. 작은 스케쥴 조율은 물론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느껴져서 그의 경영철학에서도 알수 있듯이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인간미를 충분히 느낄수가 있어 너무 감개무량했다. 

또한 감사하게도 권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고, 문득 우리 민족은 민들레씨앗과 닮아있지 않을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바람이 불면 민들레 씨앗은 흩날려 어디로 날아가는지, 어디에 싹을 틔우는지 도통 알길이 없지만 우리는 고운 민들레꽃을 곳곳에서 찾아볼수가 있다. 왜서 일까? 민들레가 지천에 예쁘게 피여있다는 것은 바람에 흩날려 어딘가에 내려앉은 작디작은 민들레 씨앗이 다시금 강한 생명력으로 경이로운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지 않을까? 

이는 꼭 한곳에 정착해서 살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에 내려앉은 자리에 강한 생명력으로 또다시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아름다운 우리를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포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