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상소감】김광림
2022년 Caraz(카라즈)컵 세계조선족 글짓기대회에 제가 대상을 수상하게 되어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저에게 이런 큰 영광을 안겨준 대회 주최측, 협찬을 해주신 여러분, 응모글을 심사해주신 5명의 심사위원 선생님께, 낭독해주시고 음악편집해주신 여러 선생님께 저의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 125편의 작품으로 이 글짓기대회에 동참하신 모든 응모자 여러분께, 또 이번 글짓기대회 응모글을 읽으시고 응원해주신 수많은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번 글짓기대회에 처음에 아주 약소한 금액으로 개인협찬에 참가했습니다. 그런 관계로 응모글이 하나 둘 발표되면서 시간나는대로 작품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응모자분들이 각자의 소중한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보면서 저도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동참할 의욕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마침 올해에 하는 일이 많아 글 쓸 충분한 시간이 없어서 8월 중순, 제가 근무하는 대학교 여름방학 기간에 여러날 집중해서 글을 썼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일본에서 유학생으로 회사 아르바이트 할때 어느 일본인이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를 읽어본 적 있는가? 내가 대학생 때 그렇게 감명 받았고, 조선인에 대한 인상이 확 바뀌더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말 듣고 도서관에 가서 찾아서 읽어봤는데 정말이지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그 후 한국어판도 읽어보면서 이 책이 저의 애독서가 되었습니다.
이번 세계조선족 글짓기대회에 이 책을 읽고 난 감동을 살려 제가 30여년간 일본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만난 수많은 조선족의 이야기를 아리랑의 선율에 담아 엮어보려 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족의 초창기 단체활동에 거의 다 참가한 경험, 일본의 조선족 커뮤니티가 근년에 성장해가는 과정에 여러 활동에 동참했던 경험을 기록에 남기고, 국제사회에서 우리 조선족동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들의 가능성과 희망을 찾아보고 그 것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동기로 8월말에 응모글 발표했지만 정작 시작하고 보니 우려감과 뒤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같이 생겨났습니다. 통상적인 글짓기대회와 달리 이 글짓기대회는 심사위원 평가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독자 수와 댓글 수를 40점 가산점으로 정했으니 응모글 내고 조용히 심사위원 평가만 기다리는 글짓기대회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구독해주고, 응원해주고 댓글 달아주어야 가산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글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특별한 글이 아니고 무슨 독자가 구름처럼 모이고 댓글이 산더미처럼 모이겠습니까? 그러니 응모자 스스로 홍보도 잘 해야 한다고 생각됐습니다. 명색이 대학교 교수란 사람이 제 글 돌리면서 읽어봐달라, 평가도 해달라 하는 일이 정말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어느 그룹에 제 스스로 응모글 올리자면 얼굴이 벌개지는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였습니다.
이런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제가 쓴 글에는 제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조선족분들의 이야기가 같이 담겨있고, 이 글 통해서 우리 조선족은 세계를 무대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조선족사회에 꼭 전해드리고 싶은 강한 의욕이 앞섰기때문입니다. 제가 먼저 움직이니 저를 이해해주시고 제 글에 동감을 표시하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제 글에 대한 구독자 수, 댓글 수가 늘어났습니다. 8월말에 응모글 발표해서 9월말 평가 기간까지 과연 얼마나 구독 수, 댓글 수가 늘어날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클릭 수 2,000회, 댓글 수 30개 정도까지 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읽어주시고 평가해주시는 과정에 구독자 수, 댓글 수가 한달이내에 많이 늘어났습니다.
심사평이 발표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어봤습니다. 전은주 심사위원님의 님 웨일즈의 《아라랑의 노래》를 읽는 듯한 감동을 독자에게 주지 못했다는 평가가 정확한 진단인 것 같습니다. 제가 더 진지한 태도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글을 썼다면 더 좋은 평가를 받았지 않았을까 후회되기도 했습니다.
9월말 평가 기간이 끝나고 나서 저의 집안의 80대 큰 형수님이 “이봐요 시동생, 이번에 상 타고 안 타고를 떠나서 시동생의 응모글에 그렇게 따스하고 애정 어린 댓글들이 많이 달리고 그 평균 수준이 아주 높다는 것을 영광으로 삼소. 수많은 분들이 시동생을 얼마나 도와주었소. 정말 행복한 일이요" 라고 80대의 경륜에서 오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정말이지 이번 응모글을 통해서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저를 도와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제가 받은 대상은 바로 이런 덕분입니다. 제 응모글에 대한 따스하고 애정어린 격려, 평가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11월3일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니가타에서 전철, 신칸센 타고 도쿄 외곽의 시상식장에 갔습니다. 그 장소가 바로 일본땅에서 처음으로 개관된 조선족문화회관이었습니다. 중국조선족이 일본에 이주해 살면서 우리의 문화회관을 가지자는 소망이 많은 분들에게 있었습니다. 사재를 털어서 그 소망을 이루어준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권호군회장님께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이번 세계조선족 글짓기대회는 우리 글을 사랑하고, 우리의 혼을 지키려는 뜻있는 분들의 담대하고 치밀한 기획에 의해 추진됐습니다. 그리고 많은 조선족의 학자, 문화인들이 지지하고 동참하고 일본, 중국, 한국의 조선족 미디어가 협력해주었습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환경속에서 일본의 조선족 경영자들과 일반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후원했습니다.
이제는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는 우리 조선족의 전례없는 글잔치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응모자의 남녀노소 구분없이, 국적의 제한없이,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우리 글로 우리의 진지하고 소중한 이야기를 엮어가는 향연이 올해 1년간 조선족사회에서 크게 화제가 됐습니다.
125편의 우리의 소중한 인생의 이야기, 진솔한 이야기속에 모든 사람들의 인생철학이 녹아들고, 삶의 애환이 여실이 보여졌습니다. 그리고 글속에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새롭고 아름다운 가치관도 같이 나타났습니다. 125편의 응모글, 그 페이지를 다 펼친다면 장대한 우리의 서사시가 아니겠습니까?!
이 뜻깊은 역사에 남을 무대에 같이 올라준 125편의 응모글의 주인공 여러분, 영광과 행운, 그리고 건강이 항상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이 주인공들을 알뜻하게 빛내주신 모든 관계자 여러분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2년 11월 6일 김광림 올림




【응모글 제43편】일본에서 쓰는 아리랑의 노래
글: 김광림 랑독:서방홍 음악편집:변소화
심금을 울려주는 《아리랑의 노래》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Edgar Snow)가 1936년에 연안을 방문하여 장정을 방금 마친 모택동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취재하여 쓴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은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진실을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역사적인 명작이다. 그런데 에드거 스노의 부인이며 저널리스트인 님 웨일즈(Nym Wales) 가 같은 시기 연안에서 조선인 혁명가 김산 (본명 장지락)을 만나 쓴 책《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은 1941년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는데 그리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 대학교의 독서교재로 지정되고 재미한국인 사회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1960년대에 대단히 인기있는 책이 되었고 진보적인 청년층이 많이 읽게 되었다. 한국에서 1980년대에 출판되어 인쇄를 몇십번 거듭하면서 진보적인 지식인과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중국에서도 1986년에 이 책이 조선어로 출판되어 많은 조선족들이 읽게 되었다. 아마 이 책처럼 조선인들의 일본의 지배에 대한 치열한 저항과 불굴의 투쟁을 생동하게 그려낸 책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저자 님 웨일즈의 조선과 조선민족에 대한 애정이 다분히 담겨있다.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하나의 빛나는 고전적인 명작으로 평가하고 싶다. 이 책이 태어나게 된 경과는 의외의 만남에서부터이다. 님 웨일즈는 1937년 초여름에 연안의 노신도서관에서 이 도서관의 많지 않은 영문도서와 잡지를 수십권씩 빌려가는 사람이 명단을 발견하여 그가 누군가 물어봤더니 연안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 있는 조선대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호기심이 생겨 그를 찾아보게 되고 그와 22번 인터뷰를 거치면서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김산은 님 웨일즈와 인터뷰를 마친 이듬해에 반혁명, 스파이라는 불투명한 죄명으로 연안에서 처형되었다. 아마 이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면 장지락이라는 조선혁명가는 역사의 기억속에서 망각되고 말았을 것이다. [珍藏版] "아리랑의 노래"(님 웨일즈 · 김산) 나는 1988년에 일본에 유학왔다. 25살 나이에 일본에 와서 이제 오십대 마감에 들어섰으니, 30여년 넘어되는 세월을 일본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의 청춘기, 중년기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수많은 조선족과 만나고 교류하고, 여러 단체활동을 통하여 의미있는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 사이 중국에 자주 다니면서 국내 조선족의 변화하는 모습을 애써 관찰했고, 미국, 영국에 2년간 체류하면서 그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조선족의 모습도 목격하게 되었다. 30여년 사이에 만난 수많은 조선족의 다정한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스치고, 가지가지의 에피소드가 여울목 물소리처럼 귓가에 아른거린다. 우리가 조선족으로서 살아온 이야기, 청춘과 중년의 시절 국경을 넘나들며서 뜨겁게 살아온 이야기, 이것도 분명히 또 하나의《아리랑의 노래》가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서 우리의 보람있는 삶을 기록에 남기려는 사명감으로 일본에서 한편의 아리랑의 노래를 써보려 한다. 초창기의 조선족의 단체활동 나는 1988년 10월에 일본에 유학하여 처음 1년반을 도쿄 외곽에 있는 쓰쿠바대학에서 연구생으로 지냈다. 그 때 쓰쿠바대학에는 여러명의 조선족이 유학하고 있었는데 신기스럽게도 서로 누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재빨리 확인하게 되고 같이 어울리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해외에 나오게 되면 조선족 사이의 연대감이 강화되어 서로 모르던 사이에도 인츰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1990년 4월부터 도쿄대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도쿄에 이주했는데 이때부터 정말이지 많은 조선족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해 5월에 도쿄에서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과 북경에서 온 조선족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동방학우회》라는 유학생, 학자모임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임이 생기면서 도쿄지역에서 조선족들이 자주 모였다. 이 모임이 결성될 때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의 김호웅선생이 연락이 가능한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편지글의 “자! 백의동포들이여! 우리 손잡고 뭉칩시다!! ” 라는 글귀가 참으로 감동스러웠다. 그 때는 유학생, 학자들마다 전화가 있은 것도 아니어서 편지로 안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모든 안내를 손쉽게 보낼 수 있는 지금이 신선같은 시대이다. 이 모임이 성립된지 얼마 안되는 1990년 7월에 도쿄지역의 조선족 20여명이 사이타마현에 있는 옛 고구려 왕족을 모시는 고려신사를 견학했다. 고려신사는 고구려의 멸망시 일본에 망명한 왕족의 영혼을 모시는 시설이고, 그 지역에 716년에 고려군(高麗郡)이라는 고구려인들을 위한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2천명에 가까운 고구려인들이 모여살았다고 한다. 산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망명 고구려인들의 정착지를 찾아 현재도 남아있는 후손들과 고려(高麗), 고려천(高麗川)이라는 지명과 만나게 되어 그날 참가자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이후 일본에서 조선족의 단체활동을 하는 경우 이 고려신사를 자주 찾는다. 그해 8월에는 오사카에서 개최된 국제고려학회 대형심포지엄에 참가하여 중국에서 참가한 조선족 지식인들과 조선, 한국, 기타 해외에서 참가한 코리아민족의 학자들과 의미있는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동방학우회》에서 가졌던 또 하나의 보람찬 활동이 1990년 여름에 20여명의 유학생, 학자와 가족들이 한국으로 10여일간의 고국방문을 다녀온 것이다. 고베에서 배를 타고 밤중에 대마도를 지나 이른 아침에 부산항에 도착하던 그 때의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일행중 대부분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부산, 포항, 경주, 서울, 판문점을 방문했는데 좋은 인상을 많이 받아 오늘까지 고국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로 남아있다.동방학우회 회원 고려신사 견학사진(1990년 7월) 《동방학우회》는 초기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다가 골간들이 일본에서 연구를 마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그 사이 1992년 6월에 일본에 유학, 또는 연구차 방문하던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이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를 새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부모임, 친목모임, 여행을 많이 조직했는데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는 어느덧 올해로 성립 30주년을 맞이하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조선족의 단체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조선족단체인 연변대학일본학우회 성립대회(1992년 6월) 《동방학우회》,《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에서 활동하던 조선족중에서 중국과 일본의 학계에서 활약하는 인물이 많이 나왔고, 나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조선족에 인재가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됐다. 1995년에 도쿄의 고락쿠료(後楽寮)라는 중국유학생, 학자회관에 들어있던 조선족 여러명이 같이 모이면서 《천지클럽》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이 차츰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중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98년 봄부터《천지클럽》과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멤버들이 손잡고 《천지클럽》을 일본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 때 《천지클럽》이 내건 슬로건이〈교류, 협력, 공동발전〉이었는데 30대 초반에서 중반 연령의 조선족들이 이 모임의 골간이 되어 일본속에서 명실상부한 조선족단체를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 때도 초기에는 온라인 시대가 아니어서 많은 안내를 편지나 엽서로 보냈는데 그 때의 안내문이나 회의기록문을 지금 다시 읽어봐도 다들 얼마나 진지하게 《천지클럽》을 키우려 했는지 생생한 감동이 아직도 전해진다. 나는 초창기의《동방학우회》와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모임에 참가하다가 1998년에《천지클럽》의 확대, 발전기에 같이 참가하면서 이 모임이 조선족사회에서 신선하고 희망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음을 느꼈다. 일본사회에서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조선족단체를 키우려는 의지가 명확했고, 조선족들이 모이면 술이나 마시는 기풍을 없애려고 술모임을 거의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모일때마다 참가비 500엔을 거두어 중국의 조선족 청소년들의 장학금으로 쓰기로 했다.《천지클럽》은 1998년부터 수년사이 좋은 활동들을 많이 조직했다. 정기적인 교류회, 취직・성공경험교류회, 무도회, 야유회, 송년회, 운동회 등 모임을 많이 가졌는데 그 때부터 여러해에 걸쳐 도쿄지역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서의 역할을《천지클럽》(이후《천지협회》로 명칭변경)이 톡톡히 했다. 이 모임의 초창기에 같이 활동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온 20, 30대의 젊은이들이었는데 다들 꿈이 많고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서 그 때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을 보면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 나로서 이 모임에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천지인문》이라는 잡지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모두들 무보수로 밤늦게까지 잡지를 만들고 때로는 자기들 돈을 들여가면서 잡지를 발행했던 것이다. 그 때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의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의욕이 대단했고, 순수하고 좋은 내용의 잡지를 2년정도 유지했던 것이다. 1999년에는 일본에 유학하던 연변대학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족에 대한 연구활동을 진행하다가 2007년에《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였는데 이 모임에 주로 학자, 대학원생들이 모이면서 일본에서 조선족연구단체로 자리를 잡았고, 규모가 큰 국제학술모임도 여러차려 개최하였다. 우리말 속담에 시작이 절반이라고 처음에 소수의 멤버들이 연구모임으로 시작한 것이 꾸준이 이어져오는 사이 일본에서의 조선족연구의 구심점이 되었다. 발전을 거듭하는 조선족사회 1980년대부터 중국조선족의 일본진출이 시작됐는데 그로부터 40여년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인구수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일본의 중국조선족의 인구수에 대하여 아주 정확한 통계는 없고, 수만명 이상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거의 틀림없을 것 같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사람, 일본에 귀화한 사람, 또는 한국국적을 취득한 사람 등 다국적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국적이 변해도 일본의 제1세대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태여났고, 같은 조선민족으로서의 동질성과 공통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면서 학우회, 동향회 및 각종 기능별 단체를 만들고 일본속에서 조선족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경향이 근년에 뚜렸하게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동방학우회》《연변대학일본학우회》《천지협회》《조선족연구학회》 등 조선족이 중심이 된 단체가 몇개밖에 없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쉼터미디어》《세계한인무역협회치바지회》《재일조선족축구협회》등 조선족이 중심이 된 단체가 여러개 늘어나고,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재일조선족경영자협회》《연변일중일본학우회》《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우리세미나》《재일조선족심목회》등 새로운 단체가 많이 생겼다. 현재 일본에는 30개가 넘어되는 조선족이 중심이 된 단체가 있다. 대학교학우회, 고중동창회, 각 기능별 단체외에도 동향회, 종친회까지 생겨 일본의 조선족 사회가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시하는 경향도 나타내고 있다. 이상의 조선족의 단체활동에서《쉼터미디어》를 통한 조선족의 활발한 교류, 《조선족연구학회》에 의한 여러차례의 국제심포지엄의 개최,《세계한인무역협회치바지회》의 차세대비지니스스쿨의 개최, 《동경샘물학교》《간사이조선족총회》의 조선족 어린이들에 대한 다언어교육 등은 일본조선족 단체활동의 모범사례로 볼 수 있다. 일본에 체류하는 조선족이 늘어나고 조선족사회가 형성되면서 대형이벤트가 개최되고, 단체활동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 이미 여러번 개최된 조선족운동회는 일본내의 조선족들이 다수가 참가하는 축제의 마당이 되여가고 있고, 2019년 11월에는 도쿄에서 <세계조선족문화절>이 개최되여 일본, 중국, 한국에서 조선족들이 많이 모이게 되였고, 조선족 예술인들이 다수 출연한 문화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일본의 현재의 여러 조선족단체가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고 보다 큰 차원에서 일본에 거주하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이 친목과 화합, 상부상조를 도모하고 중국, 한국 ,미국 등 세계 각 지역의 조선족 사회와도 소통과 협력을 촉진할 필요성을 느껴 나와 연변대학일본학우회 장경호 회장이 발기인이 되어 2019년 2월 23일에 도쿄에서 <일본내 조선족단체발전을 위한 협의회>를 소집, 개최하였다. 이 협의회에 일본의 18개 이상의 조선족단체 대표들이 모였는데 일본속에 조선족의 중심단체를 설립하는데 공감을 표시하여 그 자리에서 조선족단체발전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로부터 5차례의 조선족단체발전추진위원회가 개최됐고 매번 모임마다 긴 시간을 들이면서 일본전국규모의 조선족연합회를 구상하고, 단체의 정관을 만들고, 이사회를 구성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19년 9월 8일 재일본중국조선족 22개 단체 대표가 도쿄에 모여 제1차 이사회를 개최했고, 이사회에서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회장,부회장, 사무총장 등 임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2019년 11월 3일 도쿄에서 200여명이 모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성립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이 성립식에는 중국, 한국에서 조선족 기업가, 문화인, 예술가가 많이 참가했고, 다들 진심으로 축복해주었다.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는 일본속의 조선족의 중심단체로서 일본에서 조선족공동체를 형성하고 세계 각지의 조선족 사회와 교류,협력해가는데 있어서 금후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2019년 2월 일본내 조선족단체발전을 위한 협의회 기념사진(김권철 촬영)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조선족 1980년대부터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이래, 중국조선족의 제일 뚜렷한 변화가 전통적인 거주지인 동북지역을 떠나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이동하는 현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조선족의 가치관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고, 현대의 조선족들은 보다 열린 환경에서, 다원문화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숙명처럼 되여가고 있다. 이런 환경의 대변화속에서 우리 조선족들은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돈을 겪게 되고, 지금까지 잘 유지되어왔던 민족공동체에도 위기가 많이 생겼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조선족의 새로운 성공모델을 찾아서 거기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경향이 비교적 짙다. 그 성공모델이란 회사경영으로 사업에 성공했다거나, 연구분야에서 중국이나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거나, 음악이나 체육분야에서 명성을 많이 떨쳤다거나 하는 얘기로 많이 귀결된다. 또는 과거의 조선족의 유명인물들의 사적을 발굴하여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경향도 뚜렸하게 나타나고 있다. 내가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몇 명의 조선족들은 아직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옳바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하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나는 2009년에서 2011년 사이에 일본의 소속대학교의 연구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에 2년간 체류하면서 현지에서 여러명의 조선족을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 3명의 조선족을 소개하려 한다. 글의 내용이 보다 진실성을 띄게 하기 위하여 여기서 소개하는 3명의 조선족에 대하여 실명을 들려고 한다. 틀린 점이 있으면 이들과 독자들의 아량을 바라는 바이다. 김만수 박사 나는 2010년 8월부터 미국에서 처음에 1년간 연구활동하던 캘리포니아주의 버클리대학교 (UC Berkeley)를 떠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미국 동부의 보스턴에서 거처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보스턴에는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어 어떻게 새로운 거처를 찾을까 고민하다가 당시 내가 미국생활체험을 연재하고 있는《조글로》에 미국생활에 관한 글을 쓰고 있던 조선족 김만수 박사를 찾게 되었다. 김만수 박사는 그 때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관련 포스터닥(박사과정을 마친 후의 연구원과정)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메일을 보내니 대뜸 전화까지 걸어와서 미국에서 같은 조선족을 알게 된 반가움을 표시하고 내가 보스턴에서 거처를 찾는 문제를 크게 도와주었다. 내가 보스턴에 옮겨갈 때도 기차역까지 마중을 해주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연구를 하는 조선족연구원들을 모아서 나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적인 교분에서 내가 김만수 박사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나는 김만수 박사의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김만수박사는 연변출신으로, 연변대학교 농학원에서 수의학을 공부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기후(岐阜)대학교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의 국립연구소에서 몇 년간 연구원생활을 하다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서 포스터닥이라는 신분으로 4년간 동물의료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연구하는 기간에 김만수박사는 연구성과를 많이 내고, 특허를 두개나 따내게 되었으며 그런 성과를 인정받아 2011년 초봄에 약관 40세의 나이에 중국과학원동물연구소의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김만수 박사는 처음부터 최고의 엘리트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고,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한단계씩 발전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그가 일본에서 미국에 옮겨가는 과정에서 영어공부를 하느라고 집안 구석구석에 영어메모장을 붙혀놓고 있었다고 하며, 하버드대학교에서 4년간 연구하는 기간에 불철주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자수성가라는 말이 김만수박사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 것 같다. 연변의 농촌마을 출신으로 부모의 후광을 크게 입은 것도 아니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가면서 연변대학교에서 일본유학을 하고 다시 하버드대학교에까지 가게 되고 중국 최고의 과학연구기관에서 당당하게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박영애 원장 나는 미국에서 2년간 체류하면서 미국생활을 여러 미디어에 연재하게 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미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인터넷사이트인《조선투데이》의 운영자인 박영애 원장를 알게 되었다. 박영애 원장은 중국 길림성의 중의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지방의 여러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연변대학교 의학원을 졸업하고 북경의 중의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치고 나서 1990년부터 미국에 이민으로 건너가서 필라델피아에서 중의원을 개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영애 원장은 중의원을 경영하면서 미국에서 더 공부를 하여 중의학 박사학위를 받게까지 되었다. 그녀의 이런 경력을 보면 상당한 학구열과 근면한 노력이 있었음을 쉽게 보아낼 수 있다. 특히 여성으로서 두 자식을 미국에서 키워서 공부시키고 자신은 병원경영으로 성공했다는 자체가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박영애 원장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그의 사업에서의 성공보다 그가 사업에서 성공하고 나서 나눔의 정신을 솔선하여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영애 원장은 미국에서 딸애가 대학교를 다니던 과정에 방학이면 민간인들이 기부한 장학금으로 연수를 많이 다니는 것을 보고 본인도 그런 좋은 사업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미국에서 병원경영을 하는 과정에 재미한국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따져보면 결국 자신이 중국에서 조선족학교에 다니면서 조선어와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하여 길림성 교하시 외곽에 있는 모교인 조선족소학교에 기부를 하여 우수학생과 우수교사를 지원하고 강의용품들을 사도록 하였다. 몇 년간 모교에 기부를 해오다가 그 모교가 학생이 줄어들어 안타깝게도 페교가 되자 연변적십자회와 상의하여 도문시 농촌의 조선족소학교를 재정적으로 돕는 사업을 진행하였고 연변1중에도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연변대학교에 장학금을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하고 연변대학교에서 조선족민족박물관을 짓게 되자 거기에도 자금지원을 했다. 박영애 원장은 지금까지 길림성의 조선족학교와 연변대학교에 인민페로 수십만원이 넘어되는 기부를 해왔다. 미국에서 중의원을 경영한다고 하지만 수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금이 척척 남아도는 상황도 아닌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조선족의 민족교육에 대한 장학사업에 대단한 열성과 자긍심을 가지고 그 사업에 많은 시간과 재력을 들이고 있다. 박송림선생 나는 2011년 6월부터 3개월간 영국의 런던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영국에서 또 한명의 조선족을 만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나와 연변대학교 외국어학원에서 동료로 있던 박송림 선생을 영국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박송림선생은 연변대학교 외국어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있다가 1990년대에 영국에 유학하여 영국중부지역에 있는 랑카스터(Lancaster)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교에서 연구직으로 취직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에 유학한지 10여년이 넘어되고 이미 영국 국적을 취득하고 랑카스터시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아들애가 영국중부의 대도시인 만체스터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부부간이 랑카스터에서 주택을 구입하여 비교적 안정된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송림선생의 요청으로 나는 2011년 7월에 3박 4일간 랑카스터에 여행가서 박송림선생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그 분한테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 박송림선생이 영국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살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이다. 그는 여러 번 영국에서는 사회생활에서 정직함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며 요령을 부리거나 거짓이 이 사회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런 영국의 사회환경에서 살면서 박송림선생은 우직하다고 할만큼 정직한 삶을 추구하는 것 같았고 또 그 때문에 그의 영국에서의 이민생활은 순조로울 것 같았다. “정직함이 지혜” 라는 책의 제1장에 토머스 제퍼슨 미국 제3대 대통령의 말이 있다 싶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기본자세일 것이다. 이상 내가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3명의 조선족들은 조선족들 가운데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정직하게 살고 있거나,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사는 방식, 근면하게 노력하면서 사는 방식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거치면서 가치관과 정체성에서 혼돈을 많이 경험하는 조선족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조선족은 어디로 가는가? 오늘날 조선족가족중에 중국에서만 사는 경우가 적을 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 미국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가족이 너무나도 흔하다. 나의 가족의 경우를 보아도 내가 1988년에 일본에 유학하고 일본에 정착한 관계로 형제의 자식들을 여러 해에 걸쳐 일본유학을 주선해주고 그들도 유학을 마치고 일본에 정착했는데 현재 일본에는 조카들 가족만 7가구가 된다. 나의 형제들은 1990년대까지 외국에 나가는 법이 없었는데 2008년에 넷째 누님이 한국인과 결혼한 시누이의 주선으로 한국에 나갔고 그 후로 누님의 딸도 한국에 나가 가정을 이루고 어머니와 같이 한국에 장기체류하고 있다. 그 사이 매형이 막벌이 노동중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도 경험했다. 둘째 형님도 처가집 형제의 주선으로 2014년에 한국에 나가 형수와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장기체류하고 있고 그 사이 딸이 한국에 나가 부모와 같이 살고 아들 부부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이러다나니 생존해있는 형제들 중 이제는 큰 누님과 셋째 형님부부만 중국에 남아있고 여러 형제들의 자식들은 일본, 한국. 캐나다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오히려 중국에 소수의 친척만 남게 됐다. 이상이 나의 형제들 가족의 실상인데 조선족의 많은 가족의 실상이 엇비슷할 것이다. 조선족은 19세기 후반에 조선 함경도 지역의 대기근을 피하여 두만강 건너편의 간도로 이주한 것을 시초로 중국에서 150여년에 이르는 정착과정을 거쳤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조선족이라는 민족명칭이 생기고 집거지역에 민족자치제도가 실행되면서 중국의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민족공동체를 오래동안 유지해왔다. 그러나 주지하다 싶이 198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보다 좋은 삶을 찾아 동북의 전통적인 거주지역에서 연해지역으로 조선족의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고국인 한국으로 수십만의 조선족이 나가게 되었고, 자식벌세대는 일본, 미국 등 나라로 많이 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흩어지고, 디아스포라로서 살아가게 되었으니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오붓하게 민족공동체를 유지하던 시절이 옛날 얘기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조들이 피땀으로 개척하고 세운 땅과 마을이 일부 사라지고 고향을 상실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150여 년전에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서 살길을 찾았던 조선인, 중국에 정착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 정립된 사람들, 지금 또 한번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수십년 후의 조선족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조선족은 어디에서 살든지 보다 좋은 삶을 살아가고 조선민족으로서 민족성과 중국에 대한 애정을 항상 지닐 것이라 믿는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일본과 미국에서 조선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해보면서 조선족은 유난히 생명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디에 나가도 적응을 잘 하는편이고 뿌리를 잘 내린다. 미국같이 산설고 물설고 언어장애가 큰 나라에 가서 단기간에 정착을 해나가는 것을 보면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일본에서도 다들 맨손으로 바다를 건너와 사업을 일으키고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어엿한 조선족사회를 구축하고 있지 않는가?! 캘리포니아의 어느 한국인 가게에서 중국의 조선족을 화제로 얘기를 나누었는데 가게주인이 중국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니 세상 어디에 가서 살 수 없겠는가하면서 조선족의 생명력을 높이 평가했다. 잘 생각해보면 조선족은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다. 조선민족으로서의 민족성을 항상 지니고 중국에서 자라서 유구한 문명의 지혜를 터득하고 또 국제사회에서 선진적인 문명의 제도와 규범을 빠르게 받아들인다. 다언어, 다문화의 소양을 잘 갖추어 어느 나라에서 살아도 적응할 수 있다. 중국 국내와 한국, 일본, 미국 등 국제사회에 흩어져 살아가는 조선족의 모습을 널리 관찰해보면 우리들의 희망이 보인다. 우리민족의 민요에 나오는 '아리랑고개', 그것은 분명 희망을 찾아서 넘어가는 고개일 것이다.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면서 희망을 찾아서 넘어가는 '아리랑고개', 우리 모두는 지금 또 하나의 '아리랑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심사평
응모글 제43편 심사평「일본에서 쓰는 아리랑의 고개」 심사위원 전은주 문학평론가,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이 글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 이야기로 시작된다.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거 스노의 아내인 님 웨일즈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항일혁명가인 김산을 취재하여, “조선인들의 치열한 저항과 불굴의 투쟁을 생동하게” 그려냈다. 책에서 김산은 천부적으로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난 진보적 사고를 지닌 투사로, 진실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순례자 등으로 묘사된다. 또한 “이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면 장지락이라는 조선혁명가는 역사의 기억속에서 망각” 되었을 수도 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를 소개한 필자는 이제 천오백자나 되는 긴 이야기로 자신의 <일본에서 쓰는 아리랑의 노래>를 전개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독자는 김산의 투쟁사와는 또 다른 재일조선족의 투쟁사를 기대하게 된다. 필자는 3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일본에서 보냈다. 그러면서 수많은 조선족과 만나 서로 교류하고, 또 여러 단체의 결성에도 관여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수많은 조선족과 함께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청춘과 중년의 시절 국경을 넘나들면서 뜨겁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도 분명히 우리들의 ‘아리랑’이 아닐까 하고 자문”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나 가슴 저린 이야기들이 생략된 채 사실 기록에만 집중되어 있어 『아리랑』을 읽는 듯한 감동은 가지지 못했다. 물론 “조선족들이 모이면 술이나 마시는 기풍을 없애려고 술모임을 거의 가지지 않기로 했다”는 구절에서는 삶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어 뭉클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 글은 재일조선족 단체 결성에 대한 생생한 자료이자 기록이다. 최초에 결성한 《동방학우회》에서 시작된 조선족 모임은 그 이후 《연변대학일본학우회》, 《천지협회》, 《중국조선족연구학회》 등으로 발전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쉼터미디어》, 《세계한인무역협회치바지회》, 《재일조선족축구협회》등 여러 성격을 지닌 단체가 결성된다. 그리고 2010년대에는 《재일조선족경영자협회》, 《연변일중일본학우회》,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우리세미나》, 《재일조선족친목회》등이 생겨났고 현재 일본에는 조선족 단체가 30개나 있다. 필자는 이러한 단체의 출발과 목적 그리고 활동 내역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음으로써 단체모임 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재일 조선족 사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편의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이외에도 필자는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3명의 조선족 인사들 (김만수 박사, 박영애 원장, 박송림 선생)과의 만남도 적었다. 조선족들이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가는지를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고자 하는 필자의 노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은 저마다의 ‘아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제 ‘조선족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내세우며 조선족의 미래 전망을 그린다. “중국 국내와 한국, 일본, 미국 등 국제사회에 흩어져 살아가는 조선족의 모습을 널리 관찰해보면 우리들의 희망이 보인다. 우리민족의 민요에 나오는 아리랑 고개, 그것은 분명 희망을 찾아서 넘어가는 고개일 것이다.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면서 희망을 찾아서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 우리 모두가 지금 아리랑 고개를 넘는 것이 아닐까?” 이는 필자의 희망사항이자, 모든 조선족들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장련 프로필
•2005. 9-2007.3 연변주라지오방송국 아나운서《가요데이트》진행
•2007.4-2019.8 훈춘라지오TV방송국 아나운서《훈춘뉴스》진행
•2020.3- 북경정음우리말학교 한국어강사

변소화 프로필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기업 협찬 배너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
【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령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