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있기에 멈추지 않는다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권호군 회장 인터뷰-
세상에는 꿈을 꾸는 사람과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꿈은 아무나 꿀수 있지만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건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본의 경영의 신 마츠시다 고노스케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예쁜 벚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한다” (きれいな桜が咲くために必要なものは冬の寒さ). 다시 말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지고 위기앞에 좌절하고 무릎을 꿇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뛰는 도전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나면 마침내 따뜻한 봄날에 고운 꽃을 피워낼수 가 있다. 그렇게 꿈을 이뤄낸 자는 또 다시 누군가의 꿈이 된다. 오늘은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현임회장 및 월드옥타 치바지회 수석부회장을 겸임중인 글러벌일통 주식회사 대표 권호군 회장의 가슴 뛰는 꿈들과 그 꿈들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던지는 거침없는 도전장에 대해 엿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한다.
1.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르다-꿈을 쫓아 일본으로의 비행을 시작하다
권회장은 1973년 1월 30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태여났다. 마라톤선수의 아버지와 작곡가 어머니 슬하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밝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유년시절에 대해 질문을 하였을 때는 어렸을 때부터 지니게 된 긍정적인 마인드가 리더가 된 지금 실패앞에서도 앞을 내다보며 적극적인 자세로 도전하며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학생시절에는 단거리 달리기에 두각을 드러내 육상대회에서도 활약을 했다. 공부만이 출세라던 그 시절의 다소 보수적인 현실과 비교했을 때 이는 신선한 경험담이여서 권회장의 인간미가 더 느껴졌던 부분이였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학업에 전념하여 연변대학에서 계산기및응용학과를 전공하게 되였다. 1990년대의 중국을 살펴보면 개혁개방정책이 한창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광주나 심천같은 개혁개방의 바람을 가장 먼저 맞은 연해도시에로의 진출의 붐이 일었고, 한국기업 등 외자기업의 중국진출도 활발하게 진행되였었다. 그러한 시대배경속에서 권회장은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길에 진출한 한국계 소프트웨어 계열사에 입사해 일을 배우게 되였다. 하지만 연길이라는 무대는 권회장의 젊은 패기와 뜨거운 꿈을 담기에는 다소 협소하게 다가왔었다. 이에 갈증을 느낀 그는 과감하게 대도시인 북경으로 향하게 되였다. 북경에 들어선 그는 다시 전공을 살려 일본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의 북경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회사에는 일본인 사원들도 많았고, 클라이언트도 일본에서 자주 방문을 오는지라 자연스레 일본문화와 일본사람들을 접촉하게 되였다. 그렇게 권회장은 자연스레 우리와는 사뭇 다른 일본문화와 그들의 프로정신을 경험하게 되였다. 권회장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만큼 일본사원들의 프로정신은 실로 놀라웠고 일에 대한 섬세함 또한 뛰여났었다고 한다. 몇수 앞을 내다보며 문제점을 찾아내 미리 예방대책을 하는 등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는 현실속의 자신과의 차이를 느끼게 되였다. 이는 곧 권회장의 호기심과 학구열을 불러일으키게 되였다. 구경 무었때문에 일본이 중국보다 앞서고 세계에서 인정하는 경제강국이며 그들의 장인정신도 이토록 뛰여난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배우고 싶다는 꿈도 그렇게 부풀어가게 되였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2002년 어느 봄 날, 북경지사의 일본인 사장의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면서 권회장은 마침내 활주로를 박차고 일본으로의 비행을 시작하게 되였다.
2.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기대해왔던 일본이였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었다. 우선 언어장벽이였다. 권회장의 제1외국어가 영어였던지라 일본어는 낯설고 벅찬 존재로 다가왔었다. 클라이언트의 회사에 파견되여 일을 해도 언어의 장벽은 너무나도 단단했다. 하지만 시작을 하면 꼭 결과를 보고야마는 성격의 소유자인 권회장은 단단한 언어의 장벽에 대해 거침없는 펀치를 날렸다. 주말이면 시청(시야쿠쇼) 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평일에도 짬을 내어 일본어공부를 하면서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애를 썼었다. 그렇게 5년동안 실력을 갈고 닦은 결과, 권회장은 언어뿐만아니라 비지니스 등 여러면에서 실력과 경험, 인맥을 쌓고 역량을 확장하게 되였다. 5년동안 IT업계에 몸 담그며 역량을 확장하다보니 업계의 문제점 및 개선방향 등을 발견하게 되였다. 인재에 대한 수요 즉 기업의 채용열기는 뜨겁지만 취업시장의 인재공급이 그 열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였다. 권회장은 이제까지 확장해온 역량과 노하우를 발휘하여 회사를 설립하여 인재부족에 직면해있는 IT업계의 노동시장에 공헌하게 되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였던 것일가, 회사를 설립한지 2년도 되지 않아 리먼쇼크의 검은 그림자가 열도전체를 순식간에 삼켜버리게 되였다. 아니나 다를까 권회장도 그 폭풍에 휘말리게 되였다. 심각한 불황이 이어지면서 인재에 대한 수요도 줄어드는 탓에 직원들은 일거리가 없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은행대출도 어려워져 직원들의 임금도 미뤄지는 자금난에까지 시달리게 되였다. 금융위기로 인해 호황기였던 업계가 순식간에 불황기로 전락하며 파산의 변두리에 임박했음에도 변하지 않은게 하나 있었다. 권회장이 리더라는 사실이였다. 그는 자신도 힘든 시기임에도 직원들에게 사비를 털어서라도 임금을 지급하겠으니 희망을 잃지 말고 임금을 지급하는 동안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직원들도 안정을 찾고 권회장도 일전에 인연을 맺었던 도시바 계열사에서 다시 일하게 되면서 큰 위기를 넘기게 되였다.
3. “호황도 좋지만 불황은 더 좋다(好況よし、不況さらによし)”
권회장은 큰 위기를 넘기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고, 앞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였다. 조선족만의 강점을 발휘해서 일본사회에서 생존할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가에 대해서 말이다. 일본의 경영의 신 마츠시다 고노스케의 자서전에는 “호황도 좋지만 불황은 더 좋다. (好況よし、不況さらによし)”라는 말이 있다. 즉 불황은 위기로 인해 출발점으로 돌아가 뜻을 바로 잡고, 재점검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객관적으로 판단할수 있는 찬스를 주기 때문이다. 위기앞의 권회장이 그러했다. 그렇게 권회장은 재점검을 통해 위기와 불황기에서 발상의 전환점과 기회를 발견하게 되였다. 우리만의 강점을 생각하고 연구하던 그는 백엔숍, 전자제품가게 등 여러 상가들에 눈길을 돌리게 되였고 일용품이 거의 다 중국산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였다. 즉 언어우세와 자원우세를 충분히 이용할수 있는 길이 눈앞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였다. 권회장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이용해서 전자상거래가 금방 시작된 일본의 시장의 가능성에 투자하게 되였다. IT로부터 수입무역에 방향을 옮기고 중국물건의 수입과 판매로 업무방향을 돌리는 변혁의 길에 과감히 뛰여들게 된 것이다. 2010년 즈음에는 아이폰이 기세좋게 시장점유율을 높혀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보완재인 스마트폰케이스의 수요량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장성을 보아낸 권회장은 중국심천을 방문해 직접 시장을 돌면서 일본시장에 수출할 스마트폰케이스를 발주하고 일본에 돌아와 전자상거래를 시작하게 되였다. 하지만 예상외로 시장반응은 미지근했다. 시장성은 분명히 있는듯 하였으나 구경 어디에서 실타래가 꼬였는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IT업계에 종사해오던 그에게 물건을 팔고 사는 무역은 생소한 영역이라는 현실의 장벽을 느끼게 되였고,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였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고난을 견뎌야 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권회장은 무역업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권회장은 월드옥타 한인무역협회 치바지회 강연회에 참가해 일본유통업의 시장성과 미래성, 일본의 중국상품 의뢰성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들을 요해하게 되였다. 2012년에는 월드옥타 차세대 무역스쿨에 참가해 무역에 대한 지식을 파트너들과 함께 배우게 되였고, 마케팅에 대한 강연도 듣게 되였다. 당시 들었던 월드옥타 이영현 명예회장님의 강연은 지금까지도 권회장에게 인상깊게 박혀있다고 한다. 한국의 슈트케이스를 카나다에 수출해서 우여곡절끝에 성공을 거둔 경험담은 당시의 권회장에게 인상깊게 다가왔고 좌절을 맛본 그에게 다시금 도전하고 싶은 신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체계적인 공부를 거치고 나니 뜨뜨미지근한 시장반응의 원인도 하나 둘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현지에 가서 직접 디자인을 고르고 재료를 검토하는 수고와 노력은 했다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주관적인 감각과 생각에 의한 것일뿐, 일본시장이 원하는게 구경 무엇인지에 대한 사전조사가 없었음을 깊이 반성하게 되였다. 그렇게 일본시장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한 탐색과 연구의 리서치가 시작되였다. 일본의 전자제품성지인 아키하바라에서 시장조사를 하고 백화점이나 점포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는 손님들의 행동패턴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락텐이나 아마존에서 잘 팔리는 카테고리의 랭킹을 검색하고 회사에서 직원들과 검토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일본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의 의견과 안목이 중요하기때문에 일본인사원을 적극 채용하여 그들과 협업하게 되였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도전한 결과, 시장반응은 뜨거웠고, 무역사업은 정상궤도에 진입을 했고, 회사규모도 확장하게 되였다. 창업초기에는 오피스의 절반을 창고로 쓰던데로부터 사업규모가 커짐에 따라 창고면적을 확장하게 되였다. 또한 기성제품을 수입하던데로부터 직접 공장에 주문제작하는데로 사업 확장을 하게 되였다. 그 이유는 중국산 기성제품은 중국시장에 팔기 위해 제작된 제품으로 일본시장에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때문에 일본소비자들에게 맞는 제품을 사전조사를 통해 충분히 알아보고 디자인을 거쳐 심천공장에 주문제작할 필요성이 있기때문이다. 그렇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 뜨거운 시장반응과 더불어 위기로부터 시작한 무역사업은 큰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매출도 올라가고 수입상품의 카테고리도 늘어갔다. 스마트폰케이스에서 시작해 지금은 가전제품이나 가구 등 부피를 차지하는 물건들이 늘어가고 있다. 또한 창고가 필요한 고객에게 창고를 임대하는 방식으로 재고회전율을 높였고, 중국의 심천과 이우에 물류창고를 두어 수입할 물건을 중국 물류창고에 집결정리시켜 한번에 일본에 수입하는 등 사업의 생산성도 높이고 있다. 이는 편의성은 물론, 코스트면의 경감으로 인해 수익율을 높힐수 있게 되였다. 지금은 이바라키현 도리데시에 1만평방메터의 창고를 가지고 있으며 창고임대, 물류운송, 도매소매 등을 진행하며 손님들의 물건 대리발송과 대리판매 등도 같이 진행하고 있다. 시작한 일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일은 권회장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일단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번복하는 일이 없이 결과를 내려고 한다. 가령 성공확율이 낮은 일일지라도 일단 도전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오직 그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 한다고 한다. 인터뷰 중 가장 인상깊었던 말은 “모든 일은 오직 시작과 결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도 포기(中途半端)란 절대 금물이지요. ” 라는 말이였다. 그러한 그에게 경영철학에 대해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하는 일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창출하는 일입니다. 짧게 보면 어떻게든 수익을 내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길게 보면 사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공존공영(共存共栄)의 가치관이지요. 거래처와의 수익분배에서 윈윈의 가치관을 잘 지키면 신뢰관계를 쌓을수 있으니, 금전관계는 다소 느슨하게, 인간관계는 조금 더 긴밀하게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4.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
권회장은 처음에 일본에 왔을 때는 5년만 분투하고 귀국하려고 계획했었는데, 살다보니 일본사회에 적응하게 되고 또한 여기서 우리 민족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면 잘 살아갈수 있는 좋은 환경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였으며 이젠 일본에 마음을 붙이고 살게 되였다. 그렇게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은만큼 무역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시간적이나 자금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면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생활과 사업의 무대를 제공해주었던 지역사회에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일시적으로 마스크 부족의 대란이 일어나게 되였고 권회장은 무역의 우세를 발휘해 중국공장에서 생산한 마스크를 대량적으로 일본에 수입해 마스크 부족에 시달리는 이바라키현에 기부하게 되였다. 또한 코로나시국에 소독액 공급이 부족한 현황을 보아내 매년 교육위원회에 500미리 소독액을 2만병씩 기부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일상용품 등을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기부하고 있다.
5. 일본에서 시작하는 백의민족의 꿈-문화회관의 설립
정든 고향을 떠나 일본이라는 섬 나라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다 보면 고향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쌓여지기 마련이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하여서도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본의 지역사회뿐아니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단합과 협업에도 기여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였고, 그렇게 일본조선족경제교류협회와의 깊은 인연도 시작되게 되였다. 2019년, 권회장은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 주최한 도쿄포럼 및 세계조선족문화절에 참가하여 우리 민족이야말로 세계 어디에서 살아도 민족의 얼을 그대로 보유하며 살고 있는 우수한 민족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였다. <플랫폼을 구성하여, 조화롭게 발전하자>라는 취지는 권회장의 마음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그 후,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행사에서 지금의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金山张虎 명예회장과 만나 친분을 쌓게 되였고, 金山张虎 명예회장의 우리 민족에 대한 애착심과 우리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의지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되였으며, 金山张虎 명예회장으로부터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의 회장 제안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에 힘 입어 제2대 회장을 이어받게 되였다. 그렇게 우리 조선족의 경제와 문화에 힘을 이바지해야겠다는 가슴 뛰는 꿈이 부풀어나게 되였다. 2022년 11월 3일, 이바라키현 도리데시에서 일본조선족문화회관 창립식이 열렸다. 문화회관은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서 기획하고 권회장이 사비까지 투자하면서 설립한 것이다. 일본에는 우리의 쉼터가 마련되지 않아 문화행사를 할수 있는 변변한 장소가 없음에 고뇌를 느끼고, 문화회관설립을 제안하게 되였고, 金山张虎 명예회장, 최우림 부회장, 장경호 고문을 포함한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의 관계자분들의 협력으로 성공적으로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조선족은 생각만 해도 항상 뿌듯한 존재이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살길을 찾아서 중국땅에 발붙이고 굳세게 살아온걸 생각하면 조선족으로써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향을 등지고 유목민족처럼 떠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어 가끔은 서러울 때가 있지요. 그래서 문화회관이 재일조선족들의 서러움을 달래줄 고향집 같은 존재가 되였으면 합니다. 일본땅에서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할때면 제일 먼저 저희 경제문화교류협회를 떠올려주시고, 망설임없이 우리 문화회관을 찾아주시면 밥 한끼라도 따뜻하게 대접하며 도움을 줄수 있는데까지 힘 다해 도와드리는 것으로, 모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문화회관에서는 한복 전시나 김치 담그기, 찰떡 만들기 노래자랑, 한글 배우기 등 우리 문화와 전통을 지켜가는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도서도 가득 채워 책향기와 은은한 커피향으로 심신의 위로를 느낄수 있는 모두의 쉼터로 사용되였으면 한다. 또한 권회장은 문화교류뿐이니라 비지니스에 도움이 될수 있게 여러 제품을 전시하고 바이어지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더 많은 비지니스 기회를 창출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취재/글 김은혜(金恩恵)
김은혜(金恩恵) 프로필
•吉林省延吉市 出身
•天津大学 経済・管理学部 金融学専攻
•早稲田大学大学院 経済学研究科 修士課程卒業
•パナソニック株式会社 経理企画部 入社
인터뷰 소감 너무 좋은 기회로 권호군 회장의 인터뷰 기사 제작에 참여하게 되였다. 여러차례의 온라인교류를 통해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였다. 작은 스케쥴 조율은 물론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느껴져서 그의 경영철학에서도 알수 있듯이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인간미를 충분히 느낄수가 있어 너무 감개무량했다. 또한 감사하게도 권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고, 문득 우리 민족은 민들레씨앗과 닮아있지 않을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바람이 불면 민들레 씨앗은 흩날려 어디로 날아가는지, 어디에 싹을 틔우는지 도통 알길이 없지만 우리는 고운 민들레꽃을 곳곳에서 찾아볼수가 있다. 왜서 일까? 민들레가 지천에 예쁘게 피여있다는 것은 바람에 흩날려 어딘가에 내려앉은 작디작은 민들레 씨앗이 다시금 강한 생명력으로 경이로운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지 않을까? 이는 꼭 한곳에 정착해서 살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에 내려앉은 자리에 강한 생명력으로 또다시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아름다운 우리를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포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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