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꿈을 꾸는 사람과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꿈은 아무나 꿀수 있지만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건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본의 경영의 신 마츠시다 고노스케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예쁜 벚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한다” (きれいな桜が咲くために必要なものは冬の寒さ). 다시 말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지고 위기앞에 좌절하고 무릎을 꿇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뛰는 도전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나면 마침내 따뜻한 봄날에 고운 꽃을 피워낼수 가 있다. 그렇게 꿈을 이뤄낸 자는 또 다시 누군가의 꿈이 된다.
오늘은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현임회장 및 월드옥타 치바지회 수석부회장을 겸임중인 글러벌일통 주식회사 대표 권호군 회장의 가슴 뛰는 꿈들과 그 꿈들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던지는 거침없는 도전장에 대해 엿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한다.
1.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르다-꿈을 쫓아 일본으로의 비행을 시작하다
권회장은 1973년 1월 30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태여났다. 마라톤선수의 아버지와 작곡가 어머니 슬하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밝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유년시절에 대해 질문을 하였을 때는 어렸을 때부터 지니게 된 긍정적인 마인드가 리더가 된 지금 실패앞에서도 앞을 내다보며 적극적인 자세로 도전하며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학생시절에는 단거리 달리기에 두각을 드러내 육상대회에서도 활약을 했다. 공부만이 출세라던 그 시절의 다소 보수적인 현실과 비교했을 때 이는 신선한 경험담이여서 권회장의 인간미가 더 느껴졌던 부분이였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학업에 전념하여 연변대학에서 계산기및응용학과를 전공하게 되였다.
1990년대의 중국을 살펴보면 개혁개방정책이 한창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광주나 심천같은 개혁개방의 바람을 가장 먼저 맞은 연해도시에로의 진출의 붐이 일었고, 한국기업 등 외자기업의 중국진출도 활발하게 진행되였었다. 그러한 시대배경속에서 권회장은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길에 진출한 한국계 소프트웨어 계열사에 입사해 일을 배우게 되였다. 하지만 연길이라는 무대는 권회장의 젊은 패기와 뜨거운 꿈을 담기에는 다소 협소하게 다가왔었다. 이에 갈증을 느낀 그는 과감하게 대도시인 북경으로 향하게 되였다. 북경에 들어선 그는 다시 전공을 살려 일본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의 북경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회사에는 일본인 사원들도 많았고, 클라이언트도 일본에서 자주 방문을 오는지라 자연스레 일본문화와 일본사람들을 접촉하게 되였다. 그렇게 권회장은 자연스레 우리와는 사뭇 다른 일본문화와 그들의 프로정신을 경험하게 되였다.
권회장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만큼 일본사원들의 프로정신은 실로 놀라웠고 일에 대한 섬세함 또한 뛰여났었다고 한다. 몇수 앞을 내다보며 문제점을 찾아내 미리 예방대책을 하는 등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는 현실속의 자신과의 차이를 느끼게 되였다. 이는 곧 권회장의 호기심과 학구열을 불러일으키게 되였다. 구경 무었때문에 일본이 중국보다 앞서고 세계에서 인정하는 경제강국이며 그들의 장인정신도 이토록 뛰여난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배우고 싶다는 꿈도 그렇게 부풀어가게 되였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2002년 어느 봄 날, 북경지사의 일본인 사장의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면서 권회장은 마침내 활주로를 박차고 일본으로의 비행을 시작하게 되였다.
2.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기대해왔던 일본이였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었다. 우선 언어장벽이였다. 권회장의 제1외국어가 영어였던지라 일본어는 낯설고 벅찬 존재로 다가왔었다. 클라이언트의 회사에 파견되여 일을 해도 언어의 장벽은 너무나도 단단했다. 하지만 시작을 하면 꼭 결과를 보고야마는 성격의 소유자인 권회장은 단단한 언어의 장벽에 대해 거침없는 펀치를 날렸다. 주말이면 시청(시야쿠쇼) 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평일에도 짬을 내어 일본어공부를 하면서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애를 썼었다. 그렇게 5년동안 실력을 갈고 닦은 결과, 권회장은 언어뿐만아니라 비지니스 등 여러면에서 실력과 경험, 인맥을 쌓고 역량을 확장하게 되였다.
5년동안 IT업계에 몸 담그며 역량을 확장하다보니 업계의 문제점 및 개선방향 등을 발견하게 되였다. 인재에 대한 수요 즉 기업의 채용열기는 뜨겁지만 취업시장의 인재공급이 그 열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였다. 권회장은 이제까지 확장해온 역량과 노하우를 발휘하여 회사를 설립하여 인재부족에 직면해있는 IT업계의 노동시장에 공헌하게 되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였던 것일가, 회사를 설립한지 2년도 되지 않아 리먼쇼크의 검은 그림자가 열도전체를 순식간에 삼켜버리게 되였다. 아니나 다를까 권회장도 그 폭풍에 휘말리게 되였다. 심각한 불황이 이어지면서 인재에 대한 수요도 줄어드는 탓에 직원들은 일거리가 없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은행대출도 어려워져 직원들의 임금도 미뤄지는 자금난에까지 시달리게 되였다. 금융위기로 인해 호황기였던 업계가 순식간에 불황기로 전락하며 파산의 변두리에 임박했음에도 변하지 않은게 하나 있었다. 권회장이 리더라는 사실이였다. 그는 자신도 힘든 시기임에도 직원들에게 사비를 털어서라도 임금을 지급하겠으니 희망을 잃지 말고 임금을 지급하는 동안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직원들도 안정을 찾고 권회장도 일전에 인연을 맺었던 도시바 계열사에서 다시 일하게 되면서 큰 위기를 넘기게 되였다.
3. “호황도 좋지만 불황은 더 좋다(好況よし、不況さらによし)”
권회장은 큰 위기를 넘기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고, 앞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였다. 조선족만의 강점을 발휘해서 일본사회에서 생존할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가에 대해서 말이다. 일본의 경영의 신 마츠시다 고노스케의 자서전에는 “호황도 좋지만 불황은 더 좋다. (好況よし、不況さらによし)”라는 말이 있다. 즉 불황은 위기로 인해 출발점으로 돌아가 뜻을 바로 잡고, 재점검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객관적으로 판단할수 있는 찬스를 주기 때문이다. 위기앞의 권회장이 그러했다. 그렇게 권회장은 재점검을 통해 위기와 불황기에서 발상의 전환점과 기회를 발견하게 되였다.
우리만의 강점을 생각하고 연구하던 그는 백엔숍, 전자제품가게 등 여러 상가들에 눈길을 돌리게 되였고 일용품이 거의 다 중국산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였다. 즉 언어우세와 자원우세를 충분히 이용할수 있는 길이 눈앞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였다. 권회장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이용해서 전자상거래가 금방 시작된 일본의 시장의 가능성에 투자하게 되였다. IT로부터 수입무역에 방향을 옮기고 중국물건의 수입과 판매로 업무방향을 돌리는 변혁의 길에 과감히 뛰여들게 된 것이다.
2010년 즈음에는 아이폰이 기세좋게 시장점유율을 높혀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보완재인 스마트폰케이스의 수요량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장성을 보아낸 권회장은 중국심천을 방문해 직접 시장을 돌면서 일본시장에 수출할 스마트폰케이스를 발주하고 일본에 돌아와 전자상거래를 시작하게 되였다.
하지만 예상외로 시장반응은 미지근했다. 시장성은 분명히 있는듯 하였으나 구경 어디에서 실타래가 꼬였는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IT업계에 종사해오던 그에게 물건을 팔고 사는 무역은 생소한 영역이라는 현실의 장벽을 느끼게 되였고,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였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고난을 견뎌야 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권회장은 무역업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권회장은 월드옥타 한인무역협회 치바지회 강연회에 참가해 일본유통업의 시장성과 미래성, 일본의 중국상품 의뢰성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들을 요해하게 되였다. 2012년에는 월드옥타 차세대 무역스쿨에 참가해 무역에 대한 지식을 파트너들과 함께 배우게 되였고, 마케팅에 대한 강연도 듣게 되였다. 당시 들었던 월드옥타 이영현 명예회장님의 강연은 지금까지도 권회장에게 인상깊게 박혀있다고 한다. 한국의 슈트케이스를 카나다에 수출해서 우여곡절끝에 성공을 거둔 경험담은 당시의 권회장에게 인상깊게 다가왔고 좌절을 맛본 그에게 다시금 도전하고 싶은 신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체계적인 공부를 거치고 나니 뜨뜨미지근한 시장반응의 원인도 하나 둘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현지에 가서 직접 디자인을 고르고 재료를 검토하는 수고와 노력은 했다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주관적인 감각과 생각에 의한 것일뿐, 일본시장이 원하는게 구경 무엇인지에 대한 사전조사가 없었음을 깊이 반성하게 되였다.
그렇게 일본시장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한 탐색과 연구의 리서치가 시작되였다. 일본의 전자제품성지인 아키하바라에서 시장조사를 하고 백화점이나 점포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는 손님들의 행동패턴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락텐이나 아마존에서 잘 팔리는 카테고리의 랭킹을 검색하고 회사에서 직원들과 검토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일본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의 의견과 안목이 중요하기때문에 일본인사원을 적극 채용하여 그들과 협업하게 되였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도전한 결과, 시장반응은 뜨거웠고, 무역사업은 정상궤도에 진입을 했고, 회사규모도 확장하게 되였다. 창업초기에는 오피스의 절반을 창고로 쓰던데로부터 사업규모가 커짐에 따라 창고면적을 확장하게 되였다. 또한 기성제품을 수입하던데로부터 직접 공장에 주문제작하는데로 사업 확장을 하게 되였다. 그 이유는 중국산 기성제품은 중국시장에 팔기 위해 제작된 제품으로 일본시장에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때문에 일본소비자들에게 맞는 제품을 사전조사를 통해 충분히 알아보고 디자인을 거쳐 심천공장에 주문제작할 필요성이 있기때문이다. 그렇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 뜨거운 시장반응과 더불어 위기로부터 시작한 무역사업은 큰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매출도 올라가고 수입상품의 카테고리도 늘어갔다. 스마트폰케이스에서 시작해 지금은 가전제품이나 가구 등 부피를 차지하는 물건들이 늘어가고 있다. 또한 창고가 필요한 고객에게 창고를 임대하는 방식으로 재고회전율을 높였고, 중국의 심천과 이우에 물류창고를 두어 수입할 물건을 중국 물류창고에 집결정리시켜 한번에 일본에 수입하는 등 사업의 생산성도 높이고 있다. 이는 편의성은 물론, 코스트면의 경감으로 인해 수익율을 높힐수 있게 되였다.
지금은 이바라키현 도리데시에 1만평방메터의 창고를 가지고 있으며 창고임대, 물류운송, 도매소매 등을 진행하며 손님들의 물건 대리발송과 대리판매 등도 같이 진행하고 있다.
시작한 일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일은 권회장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일단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번복하는 일이 없이 결과를 내려고 한다. 가령 성공확율이 낮은 일일지라도 일단 도전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오직 그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 한다고 한다. 인터뷰 중 가장 인상깊었던 말은 “모든 일은 오직 시작과 결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도 포기(中途半端)란 절대 금물이지요. ” 라는 말이였다.
그러한 그에게 경영철학에 대해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하는 일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창출하는 일입니다. 짧게 보면 어떻게든 수익을 내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길게 보면 사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공존공영(共存共栄)의 가치관이지요. 거래처와의 수익분배에서 윈윈의 가치관을 잘 지키면 신뢰관계를 쌓을수 있으니, 금전관계는 다소 느슨하게, 인간관계는 조금 더 긴밀하게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4.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
권회장은 처음에 일본에 왔을 때는 5년만 분투하고 귀국하려고 계획했었는데, 살다보니 일본사회에 적응하게 되고 또한 여기서 우리 민족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면 잘 살아갈수 있는 좋은 환경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였으며 이젠 일본에 마음을 붙이고 살게 되였다. 그렇게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은만큼 무역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시간적이나 자금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면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생활과 사업의 무대를 제공해주었던 지역사회에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일시적으로 마스크 부족의 대란이 일어나게 되였고 권회장은 무역의 우세를 발휘해 중국공장에서 생산한 마스크를 대량적으로 일본에 수입해 마스크 부족에 시달리는 이바라키현에 기부하게 되였다. 또한 코로나시국에 소독액 공급이 부족한 현황을 보아내 매년 교육위원회에 500미리 소독액을 2만병씩 기부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일상용품 등을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기부하고 있다.
5. 일본에서 시작하는 백의민족의 꿈-문화회관의 설립
정든 고향을 떠나 일본이라는 섬 나라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다 보면 고향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쌓여지기 마련이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하여서도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본의 지역사회뿐아니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단합과 협업에도 기여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였고, 그렇게 일본조선족경제교류협회와의 깊은 인연도 시작되게 되였다.
2019년, 권회장은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 주최한 도쿄포럼 및 세계조선족문화절에 참가하여 우리 민족이야말로 세계 어디에서 살아도 민족의 얼을 그대로 보유하며 살고 있는 우수한 민족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였다. <플랫폼을 구성하여, 조화롭게 발전하자>라는 취지는 권회장의 마음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그 후,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행사에서 지금의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金山张虎 명예회장과 만나 친분을 쌓게 되였고, 金山张虎 명예회장의 우리 민족에 대한 애착심과 우리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의지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되였으며, 金山张虎 명예회장으로부터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의 회장 제안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에 힘 입어 제2대 회장을 이어받게 되였다. 그렇게 우리 조선족의 경제와 문화에 힘을 이바지해야겠다는 가슴 뛰는 꿈이 부풀어나게 되였다.
2022년 11월 3일, 이바라키현 도리데시에서 일본조선족문화회관 창립식이 열렸다. 문화회관은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서 기획하고 권회장이 사비까지 투자하면서 설립한 것이다. 일본에는 우리의 쉼터가 마련되지 않아 문화행사를 할수 있는 변변한 장소가 없음에 고뇌를 느끼고, 문화회관설립을 제안하게 되였고, 金山张虎 명예회장, 최우림 부회장, 장경호 고문을 포함한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의 관계자분들의 협력으로 성공적으로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조선족은 생각만 해도 항상 뿌듯한 존재이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살길을 찾아서 중국땅에 발붙이고 굳세게 살아온걸 생각하면 조선족으로써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향을 등지고 유목민족처럼 떠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어 가끔은 서러울 때가 있지요. 그래서 문화회관이 재일조선족들의 서러움을 달래줄 고향집 같은 존재가 되였으면 합니다. 일본땅에서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할때면 제일 먼저 저희 경제문화교류협회를 떠올려주시고, 망설임없이 우리 문화회관을 찾아주시면 밥 한끼라도 따뜻하게 대접하며 도움을 줄수 있는데까지 힘 다해 도와드리는 것으로, 모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문화회관에서는 한복 전시나 김치 담그기, 찰떡 만들기 노래자랑, 한글 배우기 등 우리 문화와 전통을 지켜가는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도서도 가득 채워 책향기와 은은한 커피향으로 심신의 위로를 느낄수 있는 모두의 쉼터로 사용되였으면 한다. 또한 권회장은 문화교류뿐이니라 비지니스에 도움이 될수 있게 여러 제품을 전시하고 바이어지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더 많은 비지니스 기회를 창출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인터뷰 소감
너무 좋은 기회로 권호군 회장의 인터뷰 기사 제작에 참여하게 되였다. 여러차례의 온라인교류를 통해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였다. 작은 스케쥴 조율은 물론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느껴져서 그의 경영철학에서도 알수 있듯이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의 인간미를 충분히 느낄수가 있어 너무 감개무량했다.
또한 감사하게도 권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고, 문득 우리 민족은 민들레씨앗과 닮아있지 않을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바람이 불면 민들레 씨앗은 흩날려 어디로 날아가는지, 어디에 싹을 틔우는지 도통 알길이 없지만 우리는 고운 민들레꽃을 곳곳에서 찾아볼수가 있다. 왜서 일까? 민들레가 지천에 예쁘게 피여있다는 것은 바람에 흩날려 어딘가에 내려앉은 작디작은 민들레 씨앗이 다시금 강한 생명력으로 경이로운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지 않을까?
이는 꼭 한곳에 정착해서 살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에 내려앉은 자리에 강한 생명력으로 또다시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아름다운 우리를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포근해졌다.
【수상소감】김은혜꿈에 더 가까이
우선 2022년 카라즈컵 세계조선족글짓기대회에서 격려상이라는 뜻깊은 상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신 5명의 심사위원님들,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및 후원해주신 관계자 여러분, 제 글을 더 빛나게 해주신 서방흥 아나운서님, 음악편집관계자분들, 그리고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되는 감사인사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글짓기를 통해 저는, 제가 일본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많은 분들의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힐링이 되고 감동이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였습니다. 타지에서 사는 우리 모두가 비슷한 마음들을 안고 살고있겠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저도 꼬끝이 찡해나고 따스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번 글짓기대회는 저의 글짓기 여정의 전환점이 되여줄듯 싶습니다.
볼품없는 실력임에도 글을 쓰는게 취미이고, 부끄럽지만 책을 출판하고 싶다는 꿈을 마음 한구석에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앞에 취미따위에게 주어진 시간과 여유는 그리 많지 않았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레포트나 과제 모두 중국어로 작성을 하는지라 우리말 글짓기를 놓아버렸었고, 일본에 오면서부터는 일본어를 잘해야 한다는 마음에 그나마 취미였던 독서도 모두 일본어책으로 바꾸어 버렸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짓기대회는 저에게 있어서는 다시 한번의 도전이였고, 용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저에게 심사결과는 많은 것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내밀었던 보잘 것없는 이야기가 심사위원분들의 심사점수 2위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음속에서는 놀라움, 고마움, 뿌듯함, 송구스러움 등등의 감정들과 함께 “자신감”이라는 감정이 다시금 그 존재감을 들어냈습니다.
전은주 심사위원님의 심사평이 공개되였을 때의 떨림과 내용을 확인한후의 희열은 아직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하게도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의미와 메시지가 (저의 일본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어린시절의 고향을 떠올렸고, 제가 느꼈던 그 위로를 모든 디아스포라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심사위원님께 100프로 닿는 기적을 만났기때문입니다. 저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서툰 표현에서 본질을 잡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심사평에서 “디아스포라”라는 전문용어도 알게 되여 저에게는 더없이 크고 유익한 배움의 기회였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저의 독자들중에는 저처럼 타지에서 부딪히고 상처받고 넘어지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괜찮은척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젊은 세대의 친구들과 낯선이들이 있습니다.
“은혜야, 글이 심금을 울린다.”
“저녁에 읽으면 감수성이라는 핑계가 있지만 낮에 읽어도 마음이 몽글몽글 해지는건 틀림없이 너의 진심이 와닿은거야.”
“글을 보면 너가 참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구나 싶기도 하고 요새 나도 번아웃인데 너 글을 읽고 힘을 낼 수 있을거 같아. ”
“뒤늦게 모멘트에서 보게 되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의 문장을 보고 진짜 감동되였었고 힘이 되였다. 수상 진심으로 축하한다”
등등의 오랜 친구들로부터 톡을 받았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특히 같은 년령대의 많은 친구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는건 우리의 생각과 고뇌와 좌절과 젊음이 사실은 비슷하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더 위로가 되지 않을가 싶었습니다. 부족한 내 글이 청춘의 위로가 될 수 있었다는 과분한 평가는 더 나아가 나에게 글짓기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너무 오래 놓아버려서 나조차도 믿지 못하던 내 글짓기실력이 긍정적인 평가와 인정을 받은 것만 같아 다시금 우리말 글짓기를 계속 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렇게 취미였었던 글짓기가 앞으로도 계속 취미로, 아니 그 이상의 존재로 나와 함께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글짓기를 더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였습니다. 제가 글짓기를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솜씨지만 저에게도 나름의 글짓기의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현실을 그려내고, 그안에 저의 진심을 담는 것입니다. 현실에 진심을 반영한 글에는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생겨나고, 메시지를 품은 글에는 무게가 실린다고 생각합니다. 무게 있는 글은 고스란히 독자들의 공감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무게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저의 목표이고 원칙이고 꿈입니다.
그렇게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누군가의 지친 마음에 따뜻한 위로 한잔 건넬 수 있는 별 볼일 없지만 무게 있는 이야기들을 적어가고 싶습니다.
저의 실패와 성장을 지켜봐주세요!
감사합니다!
【응모글 제51편】한 여름날의 꿈
글: 김은혜 랑독:서방흥 음악편집:변소화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온지도 4년이다. 청춘의 한자락인 4년이라는 시간속에 일본어공부에도 매진했었고 원하던 대학원에도 입학하게 되였다. 코로나로 연길에 돌아가지 못한지도 꼭 4년이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다 겪는다는 번아웃도 여러번 나를 거쳐갈만큼 나는 일본에서 내 자리를 만들기 위해 또 한번 청춘의 영혼을 갈아넣었다. 노력한만큼 4년차 되는 올해의 따뜻한 봄날에는 원하던 회사에 입사하게 되였다. 그렇게 내 시간은 쉬임없이 달려 사회초년생이라는 인생의 또 한 페이지가 서막을 열었다.
완벽해보이는 새 페이지의 서막에도 옥에 티는 존재했다.
근무지가 오사카라는 사실이다. 내정을 받고도 망설일만큼 나는 도쿄에서 오사카로 이사 가기 싫었다. 아무리 이민에 능숙한 민족이라고는 하지만 어렵사리 적응한지 4년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 이런 또 빌어먹을 “이주”라니…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아니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하지만 나도 이제 어른이다. 단 것만 삼키는게 인생이 아니라는 거, 적당히 합의보면서 살아가야 하는게 인생이라는, 이 불편한 진실쯤은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이니까, 옷가지들과 추억들을 차곡차곡 예쁘게 접어 트렁크에 담아 그렇게 오사카로 향했다.
생각해보면 오사카 근무에 질색팔색을 했던건 오사카가 싫어서도 4년을 머물던 도쿄가 좋아서도 아니다. 단지 4년을 몸 담고 있었던 우연히 만난 그 도시를 떠나기 싫었을 뿐이다. 나한테 일본은 도쿄가 좋거나 오사카가 싫거나라는 구체적인 감정들이 존재하지 않는, 단지 내가 유학을 하고 또 살아가기 위해 발 붙히는 나라,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닌 그저 그런 곳일뿐이다. 몸 담고 살지만 마음 붙히고 살아본적은 없는 곳. 그렇게 또 한번 발 붙히고 설자리를 찾기 위해 나는 대도시로 비비고 들어섰다.
입사식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신입사원연수가 시작되였다. 지금까지 저장해왔던 내 머리속 일본어뱅크의 잔고로는 턱없이 부족이였다. 전례없는 간사이벤 “듣기평가”는 물론, 전체 신입사원연수에 공장연수까지 꽉 찬 스케줄로 나는 호된 신고식을 치뤄야만 했다.
정신없이 나의 시간은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을 향해 달려갔다. 올해의 여름은 무덥다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할만큼 찜통의 연속이였다. 그 무더운 여름날 , 연수는 계속 되였고, 나는 낡은 상점가(쇼텐카이)에 자리 잡은 점포의 연수생으로 한달반동안 배정 받아 판매를 포함한 현장공사 등 현장체험을 하게 되였다.
내가 입사를 하게 된 회사는 일본의 오랜 역사를 품은 전자제품 제조업회사이다. 일본의 경영의 신이라고 알려질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창업자의 이념에 따라 창업초기부터 신입사원은 무조건 공장과 점포에서의 연수를 경험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여기서 점포란 자회사제품을 중심으로 판매하면서 설치 및 수리같은 공사도 함께 진행하는 판매점을 일컫는다.
그렇게 어리둥절 들어섰던 사람들로 복작복작했던 상점가, 이끌린듯 따라갔고 이윽고 내 두발이 멈춰섰던 곳, 날씨만큼 요상했던 그 곳에서 나의 한 여름날의 꿈이 시작되였다.
4대째 이어져 온 점포에는 사장님을 포함해서 총 9명, 그 중에 전기기술자 5명과 사무직사원 3명이 재직해있는 곳이였다.
점포에 들어섰던 첫째 날, 이미 연수생이 온다는 통지는 받으셨던지라 다들 반갑게 맞아주셨다. 통성명도 하고 점포내부와 창고 등의 위치도 소개해받고 자리도 배정받았다. 탈의실에는 연수생이라는 라벨이 붙은 내 전용 로커도 있었다. 점포에 있을 때면 접객과 판매를 어깨너머로 배웠고, 청구서 작성이나 영수증 관리 등 사무직일을 배워 적게나마 일손을 도왔고 현장에도 투입이 되였다. 현장에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에어컨이나 티비를 설치할 때 필요한 공구를 전기공지사들에게 건네주는 어시스턴트 일이나 설치전후의 청소같은 일들이였다.
그 중에서 여러번 맡았던 업무는 청구서를 배달하는 일이였다. 주문한 에어컨이나 티비나 냉장고를 설치하고 나면 후일 그에 맞는 청구서를 보내야 한다. 대개는 동네의 고객들이 많은지라 청구서를 걸어서 우편함에 넣을 수 있는 거리가 된다. 그렇게 나는 상점가의 배달원이 되여 배송업무를 시작했다. 100미터 남짓되는 좁은 골목에 자리잡은 상점가에는 여러가지 점포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사무직의 아주머니가 말씀해주신 기똥차게 맛있기로 소문난 코로케 맛집, 점포는 낡았지만 단팥빵이 맛있는 빵집과 맛은 그닥 없는데 인테리어만 괜히 멋스럽게 잘 되여 있는 빵집, 아내는 싹싹하니 살가운데 남편은 영 태도가 좋지 않기로 소문이 자자한 100엔 숍, 앞으로의 연수중에 내 점심을 책임질 든든한 슈퍼, 매콤 칼칼한 마라 맛 칼국수를 맛볼 수 있는 중국집을 지나고 나면 어느새 청구서를 넣어여 할 우편함들이 나온다. 주소를 제대로 확인하고 실수없이 우편함에 넣고 나면 딸그랑 하는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나도 미션 완료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따금씩 점포의 유리창에 비치는 작업복을 입은 내 모습을 확인하며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상점가의 배달원이 된 나한테 얘기를 걸어오고 따뜻하게 눈을 맞춰주는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너가 이번에 본사에서 새로 왔다던 연수생이구나, 참 귀엽게 생겼네.”
“일은 힘들지 않아? 이 여름에 작업복이라니 너무 더울 것 같아. 수분 보충하면서 더위 조심하렴.”
등등, 또 가끔은 눈이 마주치면 나한테 커다란 미소와 함께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시는 낯선이들도 있다. 이발관 점장님은 가위질을 하다가도 지나가는 나를 보면 가위를 든 손을 머리위로 올려 크게 흔들어보인다. 처음에는 낯선이의 걸어오는 얘기에도 낯선이의 미소에도, 그 따뜻함에도 당혹감에 가볍게 머리를 숙여 가볍게 답례를 하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상점가의 매력에 홀딱 빠져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눈을 맞추고 더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이곤 했다.
그렇게 청구서를 배달하고 나면 점심시간 된다. 점심밥은 거의 사무직의 40대후반 아주머니랑 함께 상점가의 슈퍼에서 벤또를 사서 휴식실로 돌아와 먹는다.
아주머니들은 거의 상점가의 홍보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상점가의 맛집을 속속들이 꿰고 계신다. 코로케 맛집은 물론, 한달에 딱 이틀간만 입고 되는 빵도, 고향생각이 사무쳐지는 중국집도, 검증된 미식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주머니들 덕분에 참 야무지게 알찬 점심 시간들을 보냈다. 그리고 가끔 가다가는 내 생각나서 샀다며 디저트나 빵을 사오셔서 건네주신다. 딸이랑 비슷한 나이라며 이국땅에서 열심히 배우면서 맞춰가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이 너무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신다.
점심 휴식시간이 끝나가면 오후에는 대부분 현장에 투입이 되였다. 가전을 설치하는데 필요한 공구를 건네주거나 제품운반이나 청소같은 작업을 주로 했었다. 현장은 가무잡잡하게 태닝을 한듯한 전기 기술자분들이랑 가게 되는데 알차게 배도 채웠겠다 호기롭게 현장에 가기 위해 트럭을 타러 창고로 내려가게 되면 자연스레 뒤걸음을 치지 않을 수 가 없는 지옥불을 방불케 하는 날씨이다. 거기에 작업복에 두꺼운 작업화까지 착용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는 건 일도 아니다. 게다가 에어컨을 설치하러 간다는 것은 곧 내가 40도 안팎을 도는 날씨에 에어컨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작업을 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함께 현장에 가는 전기 기술자분들의 배려어린 마음과 진심어린 걱정들이 뜨거운 더위의 악몽을 한 여름날의 추억으로 만들어 주었다. 18살부터 청춘을 이 점포에 바친 금발의 전기 기술자는 나를 딸처럼 챙겨주셨다. 내가 현장에 가는 날이면 나한테 마실 물이 있는지부터 체크하시는 스윗함을 장착하신 분이다. 어떨 때는 설치장소가 가까워 “물 안마셔도 돼요” 라고 하면 “이 날씨에 안먹으면 죽어”라는 다소 거친 농담과 함께 물을 사서 내 손에 꼭 쥐여주신다. 맨손으로 티비를 운반하려고 준비하는 내게 포장지를 뜯지 않은 새 작업장갑을 툭 건네주시는 전기 기술자도 계셨고, 손님이 건넨 과자나 음료수 전부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는 나한테 먹으라며 주시는 전기 기술자도 계신다.
햇살같은 미소뒤에 살얼음같은 마음을 지닌 일본사람들을 애석하게도 나는 4년동안 차곡차곡 많이도 경험해왔었기에 공적으로는 민페를 끼치지 말고 사적으로는 얽히지 않으려는 마음의 경계가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서 발은 붙히고 살지만 딱히 마음 붙혀본적은 거의 없었다. 별거 아닌거같은 이런 감정과 마음들을 오랜 시간 방치해두다보면 처음에는 곪아서 아프다가 마음에 결핍과 허기가 찾아오게 된다. 마음의 허기는 흔히들 말하는 공허함이나 외로움으로 표현된다.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끼듯 마음도 따뜻한 감정을 오래 느끼지 못하면 허기를 느끼게 된다. 도쿄에서의 4년은 그래왔던 것같다. 질서정연하고 모든게 교과서대로 돌아가는 이 나라에 감탄하며 발 붙히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 하다보면 오랫동안 사람냄새를 맡지 못한 나자신을 만나게 된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일상들, 기계에 짜여진 시스템, 공식적인 대답과 대응들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사람사는 냄새가 무엇인지를 잊어가게 되였다. 그렇게 점점 타지에서 사는게 다 그렇지 뭐, 어디 쉬운게 있을가, 먹고 살기 바쁜데 마음까지 채우는건 사치아닌가 라며 현실과 대충 협의보며 외로운 마음을 안고 살게 된다.
그런데 우연히 들어선 이 이상한 상점가의 낯선이들은 자꾸만 지친 나의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지어준다. 아무 이유없이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고, 아무 이유없이 내가 생각났다며 빵을 사다주고 그냥 내가 기특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또 아무런 대가없이 내 손에 시원한 음료수를 쥐여주며, 아무런 가식없이 나에게 새 작업장갑을 툭 건네준다. 내가 이땅에서 마음이 채워진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아니 마음이 허기졌다는 사실도 어쩌면 인지하지 못했던 내게 이런 감정은 너무도 오랜만이라 어쩐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어느날, 점포의 회식이 있었고 회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역까지 태워다 주신다며 나더러 자전거뒤에 타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에는 막무가내로 아버지의 자전거뒤에 쭐래쭐래 올라타곤 했지만 일본에서 나는 두사람이 한 자전거에 탑승하는 광경을 본적이 없다. 그렇게 서성이며 머뭇거리는 내게 전기기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흠…여기가 일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지, 이 밤에 혼자 역까지 걸어가는건 위험하니까 어서 타.”
그렇게 올라 탄 자전거는 왜 그렇게 신이 나던지, 습기를 머금은 밤 공기는 왜 그렇게 시원하게 느껴지던지, 숨이 탁 트이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건 또 왜인지…
그러다가 알게 되였다. 이상한 상점가의 시간들이 어린 시절의 나의 세상을 너무나도 닮아있다는 것을...
어린시절의 나의 동네는 내 세상 전부였다.
집에서는 막내라고 모든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동네에서도 귀엽다고 궁디팡팡 해주시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며 온종일 뛰여다녀도 지치지 않는 든든한 강철체력의 소꿉친구 부대들이 있었다. 하기 싫은 숙제를 끄적끄적이고는 해가 질때까지 뛰여 놀고, 그러다가 출출하면 동네슈퍼에 가서 외상으로 엄마 몰래 군것질거리도 사고, 엄마따라 장보러 시장에 가는 날이면 꼭 들러서 먹었던 갓 구운 따끈고소한 감자지지미도, 저녁밥때가 되면 친구들이랑 헤여지기 싫다고 징징거리다가 결국 아버지한테 손목 잡혀 귀가하는 결말을 맞이하던 나도. 나의 가족, 친구, 나의 낯선이들, 나를 이유없이 좋아해주고 대가없이 사랑해주는 나의 전부가 살던 그 시절 내 세상 전부였던 우리 동네, 이 이상한 상점가는 어쩐지 그 어린 시절을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처음보는 내가 귀엽다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상점가의 낯선 사람들, 대가없이 걱정해주고 관심을 주는 점포의 사람들, 나를 좋아하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채워졌던, 그래서 그 아름다운 세상이 나는 너무 좋았던 철없이 순수하고 맑기만 하던 내 어린시절의 세상을 너무나 닮아있다.
고향에 돌아 간것도 같은 민족의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닌데 비였던 마음이 채워졌다. 어딘가 차갑게 느껴지는 일본이라는 이 땅에서 내가 사람사는 냄새를 맡은건 정말 오랜만이였다. 또 그 사람냄새는 나의 어린시절을 꼭 닮아있다.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까마득히 희미해진 그 시절의 내가 한 여름날의 꿈으로 다가와 어른이 된 내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건넨듯 싶다.
어쩌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모든 이들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발 붙히고 살지만 마음 한구석이 춥고 시리고 고파온다. 외지에서 사는게 다 그렇지 뭐,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마음타령이나, 마음이 채워지면 뭐 밥 먹여주냐, 라며 마음의 허기를 돌보는 일을 포기하고 발 붙히고 살면 됐지 무슨 마음까지, 마음 붙히고 사는 일까지는 사치라고 여긴다.
자기언어로 매일 말을 할 수 있고 매일 일을 할 수 있고 어렸을 때 즐겨먹었던 어머니의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일 것 같다. 경험해본적 없어서 그 축복의 크기도 그 기쁨의 달콤함도 표현을 할 수 는 없다. 안타깝게도 그 축복을 우리는 몇백년째 온전히 누린적이 없다.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마음이 공허해진다 해도 어쩌겠나, 중요한 건 우리는 또 살아야 하니까 새로운 땅을 찾아 밭을 갈고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나는 타지에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사랑스러운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불운속에도 행운이 있듯 누릴 수 없는 축복은 존재하지만 누릴 수 없는 축복의 자리에 한 여름날의 꿈이 찾아와 매일 애쓰는 그대의 심심한 위로가 되어주기를 감히 기도하고 싶다.
심사평
응모글 제51편 심사평「한 여름날의 꿈」 심사위원 전은주 문학평론가,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
「한 여름날의 꿈」은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이다.
필자는 4년 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코로나 때문에 한 번도 귀향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원하던 회사에 취직을 하고 신입사원연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친절에 ‘허기진 마음’을 채울 수 있게 된다. 그게 바로 ‘사람 냄새’였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는 아주 담담하게 자신의 일상을 서술한다. 특히 이 글의 결말 부분에서 그 ‘사람 냄새’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세 부분은 사건의 구성으로 나눈 것이다.
첫째 부분은 도쿄로 유학 온 사실에 대한 것이다.
이 도입 부분은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이를테면 ‘강제’로 타향살이를 하며 자신이 겪었던 삶의 고초에 대해서도,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다 겪는다는 번아웃(*몸과 정신이 지쳐 고갈된 상태 : 비평인)도” 여러 차례 거쳤다는 식으로 줄여 말한다.
둘째 부분은 이 글의 중심인데, 이 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필자는 원하던 회사에 취직했지만, 신입사원연수 장소가 4년 동안 살던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라는 점에서 잠깐 망설인다. 그에게 일본은, “몸담고 살지만 마음 붙이고 살아본 적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사카에 가서 연수를 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무 이 유없이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는 그곳 사람들의 다정함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햇살 같은 미소 뒤에 살얼음 같은 마음을 지닌 일본사람들”을 많이도 경험해왔기 때문에 “사적으로는 얽히지 않으려는 마음의 경계가” 마음 한쪽에서는 늘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또 어느 날 회식을 끝나고 난 늦은 시간, 한 전기기술자의 권유로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역까지 가는 과정에서 그 모든 경계심이 녹아내리는 듯한 경험을 한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그 사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부분은 필자가 ‘사람 냄새’’를 찾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해당된다.
필자는 “질서정연하고 모든 게 교과서대로 돌아가는” 듯한 일본에 감탄하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발붙이기 위해서 애를 쓰다 보니 자신이 “오랫동안 사람냄새를” 잊고 살았던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스스로 “타지에서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어디 쉬운 게 있을가, 먹고 살기 바쁜데 마음까지 채우는 건 사치 아닌가 라며 현실과 대충 합의 보며 외로운 마음을 안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자전거 뒷자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고향의 풍경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세상이 나는 너무 좋았던 철없이 순수하고 맑기만 하던 내 어린시절의 세상을 너무나 닮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귀향한 것도, 같은 민족인을 만난 것도 아닌데도 빈 마음이 채워졌다. 차갑게 느껴져 춥던 일본에서 사람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것은 고향의 그것들과 꼭 닮아있었고,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자신이 꾼 한 여름날의 꿈으로 다가와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 푸근한 마음으로 모든 디아스포라에게 축원한다.
“타지에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사랑스러운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불운 속에도 행운이 있듯, 누릴 수 없는 축복은 존재하지만 누릴 수 없는 축복의 자리에 한 여름날의 꿈이 찾아와 매일 애쓰는 그대의 심심한 위로가 되어주기를 감히 기도하고 싶다.”
이 글이 주는 감동은 오사카 사람들이 필자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따스한 관심을 주는 그 상황이 아니다. 필자가 그곳에서 맡은 ‘사람 냄새’의 본질이 ‘고향 냄새’라는 점이 감동스럽다. 물론 ‘사람 냄새’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 타기’나 그곳 사람들의 친절함 등은 필자에게 고향의 어린시절을 상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디아스포라가 지니는 이런 ‘마음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요소는 외부의 어떤 계기가 아니라 우리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고향 냄새’ 또는 ‘고향 그리움’일 것이리라.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기업 협찬 배너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
【수상소감】남철우역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로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 (응모 8, 뉴질랜드에서의 그때) 응시자, 남철우 입니다.
2022년 Caraz컵 세계조선족글짓기대회를 조직하시고 많은 수고를 하여 주신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우리 민족 문화의 맥을 발전하는데 선두적 역할을 한 그 로고는 우리 세계조선족사회에 아주 큰 업적을 남기어 역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를 기록하였고 우리 문화를 발전 보급시키는데 아주 큰 추동력이 되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우리 조선족들은 세계 각국의 여러 나라에 진출하여 흩어지어 있다 보니 점점 자기 문화와 접촉하는 기회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인구 또한 하락하여 감소 추세이고 우리 문화가 희미하여 지는 현실이 보이고 있는 이때 아주 고맙게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서는 우리 민족의 얼을 살리는 구성자로 나서서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하여 모범적 역할을 함으로 찬탄 드립니다.
이번 대회로 하여금 우리들에게 좋은 기회를 마련하여 주시어 잠자코 숨어있던 잠재력을 캐 내여 한껏 자신의 글 솜씨 기량을 발휘함으로써 응시자들에게 자기의 문장 능력을 인정받게끔 하였습니다.
이번 글짓기대회에서 저의 작품도 격려하여 주시어, 더 힘 내어 분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앞으로 더 노력하고 더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 2022, 11, 6 남철우 -
【응모글 제8편】뉴질랜드에서의 그때
글: 남철우 랑독:장련 음악편집:변소화
어느 날 친구가 핸드폰으로 연변TV에서 방송한 최승화 가수가 부른 노래 (모두 다 갔다) 동영상을 보내왔다. 노래 가사 내용처럼 중국의 조선족들은 잘 살아 보겠다고 너나 없이 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등등 세계 각국의 어디에나 모두 다 나갔다.
사랑하는 가족과 눈물로 헤어져서 뿔뿔이 흩어져 사는 현실 사회의 진실한 실정을 제대로 반영한 좋은 노래이다. 이 노래를 들으니 가족과 다년간 갈라져 있었던 지나간 뉴질랜드에서의 그때 추억이 뇌리를 스쳐 떠 오른다.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전국각지에서는 썰물이 터지듯이 여기저기에서 돈을 벌려고 서둘러 해외출국 열풍에 가담하였다. 오직 가족과 자식위해 옛날의 못 살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부모의 도리로 돈 벌려고 목숨 걸고 고향을 떠나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세계 모든 지역에로 많이 진출하여 나갔다. 그렇게 시대 흐름의 물결을 따라 나도 해외로 출국하기로 하였다.
<뉴질랜드로 출국>
여행사를 통하여 뉴질랜드 비자를 받고 난생 처음 머나먼 외국행 출발로 가족과 친척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연길 기차역에서 열차에 올랐다. 기차는 밤새도록 달려서 장춘역에 새벽에 도착하였는데 도로 옆에는 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우리 일행은 장춘에서 추워 덜덜 떨면서 광주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 후 지상을 내려다보니 백색 눈이 안보이고 황토색 산들이 나타나다가 점점 녹색의 산야가 보이었다.
몇시간 후 광주백운 공항에 착륙하여 밖에 나와보니 파란 풀, 빨간 꽃, 야자나무가 무성하여 우리는 놀라면서 “와, 정말 중국 땅이 크고 넓구나” 하였다. 북방은12월이면 엄동설한에 눈보라 휘몰아치며 추운데 남방의 광주는 몸에 땀이 날 정도로 더워서 여름옷으로 갈아 입었다. 일주일후 우리 일행은 광주에서 비행기타고 출국하여 싱가포르를 경과하여 뉴질랜드의 오클랜드공항에 도착하였다. 입국 검사대 앞에서 입국카드를 작성하는데 초비상이 걸렸다. 우리 세대 연령대에는 영어를 전혀 배우지도 않아 달랑 (오케이, 노 우) 만 아는데 어떻게 영어로 쓰겠는가? 본인의 신분과 동기를 안되는 수준으로 겨우 쓰고는 입국심사를 받으려 하니 영어로 까다롭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뭐라고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정말 난처하였다. 태어나 처음 영어권 사람들과 대화하여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니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너무 답답하였다. 그러니 우리를 잠시 안쪽 대기실에서 기다리라 하더니 10여분후 중국어 통역관을 불러와 이것저것 많은 질문에 대답하였더니 OK하면서 여권에 도장을 찍고 통과시켜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느새 어두운 저녁이 되였다. 우리는 차를 타고 한시간 이상 달려서 오클랜드시 노스 코트 한인교회에 도착하여 보니 많은 연변, 료녕, 흑룡강성 지역의 사람들이 이미 하숙을 하면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뉴질랜드의 취업난>
뉴질랜드는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민국가인데 제일 큰 도시인 오클랜드는 130만 인구로서 고층건물이 적고 저층건물로 이루어 졌으며 땅 공간마다 잔디풀이 심어져 있으며 일년내내 꽃이 피고 수풀이 우거진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교통수단은 공공버스 선로가 일부분에만 국한되어 있고 택시는 전화 예약제로 운영되어 길가에서 손을 들어도 탑승할 수 없고 예약없이 승차는 불가능하였다. 대중교통이 열악하여 자가용 차는 필수로 있어야 했다. 뉴질랜드는 워낙 인구 적고 공업생산이 없어 일자리가 적기에 외국에서 오는 많은 유능한 사람들도 취업이 어려웠고 우리는 더욱 언어가 통하지 않기에 일자리 찾기가 더 힘들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몇 주 지나갔지만 일자리 못 찾아 속만 바짝 타 들어 가면서 밥맛은 없어지고 체중은 줄어들며 한숨만 내쉬었다. 우리보다 앞서 온 많은 사람들도 취업을 하지 못하여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미리 생각한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에서의 생활이란 스타트부터 순탄하지 않다는 예고를 암시하는 느낌이 다가오고 있었다.
1월달의 남반구는 북반구와 정반대로 제일 무더운 여름철이기에 소낙비가 자주 내렸다. 가뜩이나 속을 태우며 백수 생활하는데 그날따라 번개와 우레소리가 요란하더니 갑자기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어 댔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량의 폭우가 오는 것을 처음 보았다. 기숙사 유리창에 퍼붓는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광경으로 하여금 마음이 쓸쓸해지면서 폭우의 요란한 울림소리와 함께 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한바탕 울었다.
왜냐하면 생소한 영어권의 이국 땅에서 앞으로 가야할 길이 너무 막막하여 어떻게 할 방도가 없고 창가에 기대여 서있는 자신의 슬픈 처지가 쏟아지는 빗물과 흡사하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었다. 많은 경비를 투자하여 생소하고 머나먼 영어권 나라로 찾아왔는데 언제 본전을 뽑고 언제 생활비를 벌겠는가 하고 의구심만 생기며 앞으로의 희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만 앞서면서 어떠한 해결책도 생각나지 않고 밤에는 별의별 잡생각에 잠들 수 없어 이리저리 뒤척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하였다.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어느 날 마음씨 좋은 한국 이민자의 알선 도움으로 가정집 청소, 건물 페인트칠 등등 잡일을 하였는데 하루 일하고 이틀이상이 공백인 하루살이 단기 일이기에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그럭저럭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한인 생활정보 신문에 실린 자동차 정비 구인광고를 보자마자 이튿날 무작정 부랴부랴 찾아가서 면담을 하였다.
한국 이민자 비즈니스로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린 사장님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의 손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일을 하던 사람이 아니라 하였다. 손이 거칠지 않고 보들보들하냐며 공구를 주면서 나사를 풀고 조여 보라고 하였다. 원래 차 수리 경험이 많은 내가 능숙하게 공구를 다루니 “기계는 좀 만져 보았군” 하고는 집에 돌아가서 기다리면 생각해 보고 며칠 후에 소식을 주겠다고 하였다. 기다리라는 말은 아예 안된다는 말보다 못하였다.
나는 여기서 일을 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사정하며 말하였더니 그러면 내일부터 임시 출근하되 일하는 것을 지켜보겠다고 하였다. 이튿날부터 나는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밤 늦게까지 힘들어도 응당 겪어야 할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겸허히 받아들이어 기술 숙련도를 더욱 제고하면서 차츰 외국에서의 직업적 본능에 적응하게 되었다. 차를 고치러 오는 모든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서비스를 잘 함으로써 최선의 노력으로 자동차 정비일에 열중하였다.
나를 직원으로 받은 그 이후부터 자동차 정비, 판금, 도색 일거리가 적던 데로부터 점차 많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뉴질랜드에는 중국 본토,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중화 권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나하고 중국어가 통하기 때문에 편하다고 대거로 자동차 고치러 찾아오면서 수입이 일약 늘어났다.
그후 중국신문에 광고를 내니 중국 유학생들까지 찾아오면서 고객이 더 많아 지었다. 나의 활약으로 오클랜드시 전역에 소문나면서 규모를 늘리어 차 수리하는 서양인 직원도 더 받아들이었다. 처음에는 서양인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날이 감에 따라 영어를 조금씩 터득하면서 의사 소통이 잘되어 서로 손이 잘 맞았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니 자동차 수리 공장은 돈벌이가 점점 더 잘 되어서 사장님은 나보고 일등공신이라고 연신 칭찬하면서 얼굴에는 웃음이 떠 날줄을 몰랐다.
<서양인들의 예절문화>
어느 일요일 쉬는 날 아침에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서양인 아줌마 두 분이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웃으면서 상냥하게 “하이, 굿 모닝?”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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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 보는 모르는 사이이니 나하고 인사하는 것이 아니겠지 하면서 뒤의 아는 사람과 인사할 거라고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분명 나하고 인사하는 것이 맞았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재빨리 안되는 영어 발음으로 “굿 모닝” 하면서 답변 인사하였다. 그렇게 당지 사람들은 면목이 없어도 아침에 만나는 사람과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처음에는 이국에서 낯선 서양인들이 영어로 인사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면서 다시 머리 돌려 그들이 가고 있는 뒤 모습을 바라보면서 새로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 친구들 같이 식당에서 식사하고 인행도에서 걸어 가는데 덩치 크고 팔과 얼굴에 문신을 새긴 험상하게 생긴 서양인 두 명이 술에 많이 취해서 걸어오다가 비틀거리더니 우리와 부딪혔다. 우리는 겁이 나서 옆으로 피하는데 그들은 허리를 굽히며 “아임 쏘리” 하면서 사죄하였다. 술에 엄청 취했는데 시비치기 하지 않고 오히려 자아 반성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뉴질랜드의 당지인들은 예절 바르고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서양인들의 예절문명에 감동되었고 내가 여태껏 너무 한참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기에 사람이란 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자기의 부족점을 알고 우수한 문명문화를 받아들이어 배워야 하겠다는 것을 한층 더 깊이 터득하였다.
<사투리의 에피소드>
그곳 뉴질랜드에는 중국에서 간 조선족들이 많았는데 나와 가까운 친구들이 자주 찾아와서 자기 속심의 얘기를 나누곤 하였다. 어느날 나의 친구가 우리 공장에 와서 사장님과 대화를 하던 장면이 너무도 코믹하였다. 그 친구는 “사장님, 잘 있었습둥? 와기 우에 거르마의 헤로 댐배가 보이는데 한 대 좀 피우깁소, 그리구 비지깨도 같이 줍소” 하고 말하였다.
사장님은 나보고 “저 아저씨의 말을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네, 뭐라고 하는지 설명해 주세요”, 나는 웃으면서 통역관인양 자세히 설명했더니 “와, 저분은 연변 사투리가 특별히 심하네요”
그 친구는 또 습관적으로 “저녁에 몇시에 쌰발 함둥? 요기 옆에 중국식당에 같이 가서 초우채에다가 피주 한잔 합시다”. 사장님은 웃으면서 “같은 연변 사람인데 다른 분들의 말은 쉽게 통하지만 이 아저씨는 뭐라고 말하는지 도무지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네” 하면서 그냥 마주 보고만 있었다. 우리는 그 친구의 이미 배어진 사투리에 참을 수 없어서 한참 웃었다. 어디에 이런 각본 없는 코미디가 있겠는가, 똑같은 우리민족 말인 데도 외국어처럼 알아듣지를 못하다니. 그런데 그 친구는 내 말이 어떻다고 웃냐며 사투리로 인한 대화소통이 안되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지 못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의 어문 표준대로 말을하여도 괜찮은데 사회 실생활의 방언을 그대로 구사하니 더욱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지역적인 관계로 서울말과 연변 방언의 차이가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어려 서부터 나이들 때까지 이미 굳어진 말투이니 어느 순간에 습관적으로 튕겨 나갈지 모른다. 그후부터 나는 그 친구의 말을 계기로 삼아 조심스럽게 사투리를 극복하면서 표준어를 하느라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가족을 그리는 회포>
남태평양의 오스트레일리아 와 바다를 사이 둔 뉴질랜드는 중국 시간보다 4시간 빠르고 환경오염이 없는 청정한 나라이니까 그런지 보름달이 아주 크고 특별히 환하였다.
밤하늘에 밝은 달이 뜨고 뭇별들이 반짝일 때면 북반구의 고향 방향을 향하여 가족을 그리면서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같은 달을 바라보고는 있건만 저 멀리 갈라져 있는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애들은 지금은 얼마나 컸는지” 생각하면서 그리운 가족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전화기를 들곤 하였다. 그 당시에는 화상통화 시스템이 없었기에 목소리를 듣는 자체만이라도 너무 기뻤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저녁이면 조용히 남반구의 밤하늘에 빛나는 남십자성을 바라
보며 북반구 북두칠성을 연상하여 무언의 회포로 중얼거리다가 가족의 형상을 뇌리에 떠 올리며 필을 들어 쓴 편지만 그 얼마였던지 헤아릴 수 없었다.
비록 고향을 떠나 잠시 해외에서 홀로 고생하고 있지만 오로지 마누라와 자식을 위하여 상봉의 그날까지 피곤하고 힘들어도 노력하며 더 좋은 성과를 이루기 위해 피땀을 흘려가면서 계속 분투하리라 다짐하기도 하였다.
<비약적으로 변모된 고향 모습>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세상일이란 종종 자기가 원하는 계획대로 제대로 안될 때가 있다.
이제는 모든 면에서 적응되었고 안착되어 마음을 먹고 뭔가 한번 좀 성취하려고 설계도를 구상하고 한참 그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뜻하지 않는 사정이 생기어 부득이하게 뉴질랜드와 빠이빠이 하면서 귀국 하여야만 하였다. 어쩔 수없이 고향으로 귀국하여 돌아와서 보니 출국전의 옛 모습이 너무 많이 변하여 알아볼 수없이 놀라보게 발전하였다.
애들은 나의 키보다 훨씬 더 크게 성장했고 마누라는 얼굴에 주름이 늘어 그동안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한 흔적이 보이었다. 시내는 현대적인 고층 아파트가 여기저기 즐비하게 늘어섰고 거리마다 가로수 우거지고 환경 미화가 깨끗하게 잘 되어 시야가 기분 좋게 안겨왔다.
몰라보게 변모된 고향 모습을 바라보면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것이 진짜로 이럴 때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구나 하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심사평
응모글 제8편 심사평「뉴질랜드에서의 그때」 심사위원 이동렬 동북아신문 대표,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뉴질랜드에서의 그때”이 글은 취업난이 심한 뉴질랜드에서 작자의 성실한 노력과 아이디어로 한국인 사장이 설립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중화권 사람들을 포섭하고“중국신문에 광고”까지 내서 더 많은 손님들을 유치해 회사의“일등공신”이 된 등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제목을 보면 너무 기대가 되는 글이다. 남서태평양에 위치해있는 섬나라, 청정지역으로 유명한 뉴질랜드, “그곳”에서 “그때” 과연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독자들은 너무 궁금해할 것 같다.
이렇게 글에서 제목을 잘 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제목은 독자가 제일 처음 접하는 것이기에 내용에 어울리면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할 수가 있어야 한다.
“뉴질랜드에서의 그때”라는 제목은 사건이 벌어질 장소와 시간을 명시해주고 있다. 사뭇 호기심을 유발하며 이 글을 빨리 읽어내려갈 수 있도록 유혹하고 있다.
혹, “뉴질랜드”를 가보지 않은 독자들은 뉴질랜드의 인문풍토를 알고싶어할 것이요, 또 작자가 뉴질랜드에서 “그때”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굼해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낯설고 물설은 뉴질랜드에 가서 작자가 어떻게 생활의 어려움과 실패를 이겨내고 외국생활에 적응하면서 성공, 또는 실패를 했고 희열, 또는 고뇌를 가졌을까? 혹은 기상천외의 일을 겪었을까? 혹은 뉴질랜드의 어떤 인문풍토에 반해 인상 깊은 유람을 했을까?”하는 의문을 갖고 글을 읽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작자는 제목을 매력적으로 달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제목을 이렇게 단 이상 글의 구성은 “뉴질랜드”에서 “그때” 벌어진 이야기로 짜여져야 할 것이다. “그때”란 시간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시간상의 어떤 점이나 부분”을 가리킨다. 반드시 뉴질랜드에서 있은 일이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주지하다시피, 한편의 짧은 수기에서 이것저것 보는데로, 느낀데로 쓸 수가 없다. 작자가 보여주려는 주제를 벗어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재료구성이 그러해야 할 것이다.
글은 특정한 “원리”에 따라 구성요소를 배열하는데 특별한 사건의 유형들인 행위, 장면, 전환점, 플롯(구성)의 역전 등으로 구성이 된다. 이것을 슈제트라고 한다. 즉 한편의 글은 체계가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 글의 슈제트 구성의 특점은 작자가 소제목을 달아 독자들로 하여금 글의 본문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짐작하게 짠 것이다. 이런 소제목은 독서의 몰입도를 높여주고 글의 핵심을 전달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고 있다.
글의 소제목을 살펴보자.
“(서두), 뉴질랜드로 출국, 뉴질랜드의 취업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서양인들의 예절문화, 사투리의 에피소드, 가족을 그리는 회포, 비약적으로 변모된 고향 모습” 등 순(順)이다.
소제목을 보면 독자들은 좀 어리둥절해 할 것 같다. 서두와 결말을 빼고 거기서 “서양인의 예절문화”와“사투리의 에피소드”를 빼고 나면 뭐가 남을까? 뉴질랜드에 돈 벌러 간 외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이 글은 서두와 결말 부분을 포함해 견문(见闻)을 이것저것 다 썼다는 말이 된다. 즉 글의 재료들이 어떤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취사선택이 된 것이 아니고 출국할 때, 귀국해서, 또 거기 가서도 주제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생각나는데로 소제목을 달아 쓰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수기는 결코 견문(见闻)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뜻깊은 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재료는 당연히 “뉴질래의 취업난”과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등이어야 할 것 같다. 거기서 겪은 내용들을 좀 더 발굴해서 주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이 글은 좀 더 큰 감동을 주었을 것이고, 무게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점이 제일 아쉽다.
그래도 다행히 이 글은 조리정연하게 글을 엮어내려가서 읽는데 별로 부담이 없었다. 가끔 가다 생활에서 겪은 안타까운 심리에 대한 묘사와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대한 대화묘사를 통해 문장의 깊이와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했는데 그런 부분은 많이 칭찬을 해주고 싶다.
예를 들면 이국타향에서 취업을 할 수가 없게 되자 그 안타까움을 “기숙사 유리창에 퍼붓는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광경으로 하여금 마음이 쓸쓸해지면서 폭우의 요란한 울림소리와 함께 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한바탕 울었다.”라는 묘사나, 또 자동차 정비공장에 취직하러 가서는 사장님이 며칠 후에 소식을 주겠다고 하자 “기다리라는 말은 아예 안된다는 말보다 못하였다.”라고 안타깝고 절박한 심리를 보여준 점 등이다.
연변친구의 사투리도 너무 재미있게 묘사했다. “저녁에 몇시에 쌰발 함둥? 요기 옆에 중국식당에 같이 가서 초우채에다가 피주 한잔 합시다.”라는 대화묘사는 인물의 출신과 성격을 아주 생동하게 그려주고 있다.
앞으로 슈제트 구성에 대해 많이 고민을 하면서 열심히 글쓰기를 하면 작자에게서 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기업 협찬 배너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
【수상소감】김경희나도 한송이 꽃이였다
2022년 Caraz(카라즈)컵 세계조선족글짓기대회 시상식에서 격려상을 수상한 나의 글 "나는 조선어문교원이다"의 제일 마지막에 나는 이렇게 썼다.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꽃에 있다지만 꽃을 받쳐주는 든든한 줄기와 꽃을 지켜주는 든든한 가시가 없다면 어찌 꽃의 아름다움을 운운할 수가 있겠는가! 꽃이 우리 민족의 얼로서의 우리 글과 우리 말이라면 나는 달가이 꽃을 떠이는 줄기가 되고 꽃을 지키는 가시가 되리!
꽃을 떠이는 줄기가 있고 꽃을 지켜주는 가시가 있을 때 나도 한송이 아름다운 꽃이였다.
이건 이번 대회의 전반과정을 지켜보며 얻은 하나의 감탄이다.
못난 나의 글이 22번째 글로 조글로에 실려서부터 세계 방방곡곡에 계시는, 우리 민족의 글과 언어를 관심하고 사랑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와 사랑을 받았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힘과 용기를 부어넣어주는 댓글들을 보면서 나도 한송이 아름다운 꽃이였구나 하는 감탄에 저도 몰래 감격의 마음에 젖어들게 되였다.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달가이 꽃을 떠받드는 줄기와 꽃을 지키는 가시로 되여서 우리 민족의 얼을 살려가는 일에, 우리 민족의 얼을 이어가는 일에 솔선수범하고 있구나! 는 감탄에 저도 몰래 고개 숙여지였고 존경의 마음이 앞섰다. 더우기 일개 편벽한 산재지역에 있으면서 외계와의 련계가 거의 공백이다 싶이 한 나의 협소한 공간의 글에까지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사랑을 푹푹 떠주는 그 도량 넓은 민족애에 감동되였다.
나도 한송이 꽃으로 나섰기에 다른 꽃들로 나선 사람들의 작품도 열심히 살펴보았다. 그중에서도 대상 수상자 김광림교수의 "일본에서 쓰는 아리랑의 노래"를 시청하며 그 방대한 스케일과 거창한 소재와 이방인으로 되여 민족의 얼을 잃지 않고 타국에서 우리 민족문화를 계승발전하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씩 전진을 확보하며 힘들게 걸어온 이야기들을 보며 이런 글이야말로 타국에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걸어온 우리 민족의 진정한 투쟁사가 아니겠는가고 반문하며 나의 지극히 협애하고 보잘것 없는 글에 대해, 너무나도 한일이 적은 나에 대해 깊이 반성해보는 시간이 되였다.
김광림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비록 걸어온 발자국들에 맺혀진 가슴 저린 이야기들은 크게 읽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타국에서 한걸음 한걸음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걸어온 발자취들을 읽노라면 이미 읽었던 조정래의 "새아리랑"이 떠올려지며 그 발전사에 깃든 아픔, 설음, 탄식, 비통들도 얼마든지 글줄속에 슴배여들어가 내 마음에 줄기찬 파도가 출렁대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음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꽃들이 전반 사회무대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빛을 발하게 해준, 그런 영광의 무대를 마련해준 주최측과 이 대회에 후원을 아끼지 않은 분들께 한송이 꽃으로서 고마움의 심심한 인사를 올리는 바이다. 이번 활동 전반과정에서의 그들의 로고는 더 말할것도 없고 마지막 마무리 일에서까지 우리 꽃들에게 최대의 관심과 사랑을 쏟아부으며 달가이 꽃의 줄기와 가시로 나서 용약 활약한 우리 민족의 든든한 지킴이들에 다함없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한떨기 꽃으로 나서서 이 대회를 울긋불긋 꽃세상으로 물들인 전체 응모자 여러분께도 한떨기 꽃으로 된 자부심으로 앞으로도 우리 민족의 글과 말, 문화를 이어가는 길에서 단결하여 있는 힘 다 할것을 호소하고 맹세 다진다.
끝으로 전 세계에 메아리로 울리는 아리랑 노래와 함께 우리 진달래 민족이 우리 민족 글과 말, 문화를 대대로 이어온 고난의 력사를 가슴 깊이 새기고 더욱 더 우렁차게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민족의 꽃을 더 아름답게 더 찬연하게 빛뿌리게 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 우리 민족문화의 든든한 지킴이로 꿋꿋이 나설 것을 다지며 우리 민족문화가 나날이 번영창성할 것을 두손 모아 삼가 빈다.
【응모글 제22편】나는 조선어문 교원이다
글: 김경희 랑독:윤련순 음악편집:변소화
1987년도 흑룡강성오상조선족사범학교 제1기 졸업생으로 고향마을에 분배받은 나는 소학교 5학년 졸업반 조선어문을 담당하게 되였다.
그때 나의 나이 19살, 애들과의 나이차가 많아서 7살이였고 시골에 있다가 늦게 학교붙은 애들과는 3~4살차이밖에 안되였다. 정말 애가 애들을 가르친다는 농촌 아줌마들의 말과 똑 같았다.
머리 큰 남자애들은 성냥갑안에 시퍼런 버들벌레를 넣어서는 나를 보고 열어보라고 해서 나를 놀래우기도 했고 뱀껍질을 휘저어서 나를 질색시키기도 했다. 그때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놀라는 애된 처녀선생님이 그렇게 걔들한테는 재미나는 놀이풀이 대상이였다.
심지어 수업시간에 내가 과문을 읽어줄 때도 늘 상스럽지 못한 소리로 큰소리를 내어 왕왕 읽기까지 했다. 나는 처음에 그런 상황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애당초 조선어문교원이 아니라 눈물교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눈물로 머리 체적만 크고 배운 게 없이 상스런 아이들을 가르치다가는 나의 한생을 교육사업에 불사르겠다던 인생목표는 죽도 밥도 아니될 것이였다. 그때 내가 이를 악물고 일어선 것이 곧바로 조선말교육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고 순종시키겠다는 결심이었다.
나는 애들의 호기심을 끌만한 력사인물들의 재미나는 이야기들을 교학중에 심심찮게 끌어들이며 애들의 마음을 샀고 반에서 말썽꾸러기애에게 재미나는 영웅이야기를 들려주어 그가 반 애들앞에서 장기표현하는 그 기회를 빌어 그 애를 높이 칭찬해주는 것으로 다른 애들도 해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조선어과목에 대한 학습흥취도 불러일으켰다. 조선어문교학을 재밋게 한다는 인상이 서서인지 자기들의 참여의식이 서서인지 이제 머리 체적만 크고 배운 게 없이 상스러웠던 애들은 더는 이상하지 않았고 나를 어린 선생대하듯 하던 학생들도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되였다. 오히려 아침문을 열고 출근하려고 보면 언제 가만히 가져다 놓았는지 민들레요, 쑥이요, 미나리요…등 나물들이 반갑게 나를 맞아주곤 하였다.
한번씩 산골마을에 다녀오는 애들은 고향샘물이랑 산열매랑 고사리랑 취랑 더덕이랑 가져와 맛보라면서 주는 것이였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애들의 순진한 마음이였다. 애들을 늦게까지 보도해 줄때면 터전 과일이랑 맛있는 먹거리들을 나의 책상에 슬그머니 놓고 돌아서는 귀여운 아이들이 많아졌고 늦은 시간에 퇴근할 때면 남자애들은 마치 호위병이나 된듯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나를 집까지 배웅하는 것이였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걷는 것이 별재미라면서 말이다. “지식은 힘이다”는 도리를 잘 익혀가는 시간들이였다.
교원사업을 시작해서 겨우 석 달이 지났는데 학교에서는 나에게 향(乡) 내 조선족소학교 조선어 공개수업을 내놓으라는 임무를 맡겼다. 나도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선뜻이 그 임무를 맡아 나섰다.
나는 사범학교에서 배운 류남현 선생님의 교수법과 석달내에 “골치덩이”들을 학생으로“귀의”시킬 수 있었던 수단-인물이야기를 결부시켜 교수안을 준비한 후 향 내 조선족학교교원들이 수업경청을 하는 가운데 예전처럼 수업을 편하게 진행했다.
나의 공개수업은 반응이 아주 좋았다. 우선 과목에 대한 나의 수업이 아주 독창적이란 평가를 받았고 수업중에 신화인물이나 역사인물의 이야기를 간간히 간을 치면서 과목에 대한 흥취를 불러일으킨 것, 수업이 끝날 때까지 여러 인물들의 성격을 완벽히 소화해내어 우리 조선족어린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역사이야기를 심어준 쾌거라고 절찬을 받았다.
그 후, 나는 수업에서 우리민족의 풍속, 성씨, 예의 등을 틈틈이 끼워넣어 조선족어린이들이 자기민족의 생활풍속과 전통을 알게 하고 자기민족의 역사를 알게 하였다. 이런 나의 독특한 수업은 더욱 큰 성과를 이루어 현, 시, 성 에 이르는 교학경색들에서 자주 선을 보이게 되였다.
한해한해 애들을 초중에 올려보내면서 어딘가 뭔지 모를 그 무엇인가를 채 해주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였는데 내 아이 1학년 때 “수정체속에서”란 글을 계발 지도해 아동세계 20주년 글짓기콩크르에서 은상을 수여받으면서 그 늘 모자라는 부분이 무엇이였던가를 무릅치며 깨닫게 되였다.
조선어문교원으로서 수업에서 좋은 성과를 이룩해야 할 뿐만아니라 우리 조선족어린이들이 자기 앞 글짓기를 잘하고 자기 앞 표달을 잘하는 것이 조선말학습의 최고목표가 아니겠는가! 1학년 애도 계발과 계시를 통하여 멋진 글을 써내는데 하물며 고년급 아이들이야 더 잘해낼 수 있지 않을 가.
그때부터 퇴직을 앞둔 지금까지 학생들에 대한 글짓기지도를 견지해오고 있다. 상과시간이든 과외시간이든 기회만 되면 애들에게 우리 말 글짓기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휴식일에도 40평짜리 나의 작은 집에 글짓기에 흥취가 있는 애들을 불러들여서 북실대며 일기쓰기로부터 시작하여 이야기글, 독서감상문, 동시, 동요 등 애들에게 맞는 문체의 글짓기지도에 정력을 쏟아넣었다. 그리하여 쩍하면 흑룡강성 소학생간행물인 “꽃동산”과 소년보에 내가 지도한 애들의 글들이 실렸고 최미영, 리빈, 한영, 김화복, 안영, 김윤천, 주현미 등 애들은 홈타민컵, 새별컵, 희망컵, 소년아동 클짓기콩클, 꽃동산 글짓기콩클들에서 륙속 은상, 동상의 우수한 영예들을 획득하는 호황기를 이루었다. 현 진수부에서도 현 조선어문작문과 공개수업을 조직하여 나의 작문과지도를 전현 선생님들께 선 보였다. 물은 트는데로 흐른다는 속담을 잘 익혀가는 과정이였다.
또 한가지는 우리 애 2학년 때 전시 조선족 랑송, 랑독, 이야기, 악기, 무용시합이 있었는데 우리 애한테 “콩쥐, 팥쥐”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훈련시켰다. 후엄마와 콩쥐의 역을 어찌도 생동히 잘 표현하였던지 총점 96점으로 2등점수 92점을 시원하게 뒤에 따돌리고 모든 항목 통털어 특등상을 수여받았다. 나도 당연히 특등지도상을 수여받았다. 그때부터 학교령도에서는 2년에 한번씩 있는 시 랑독, 랑송, 이야기대회때마다 나에게 큰 희망을 걸곤 하였다. 나도 학교령도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평상시상과부터 줄곧 노력에 노력을 경주하여 번마다 특등상을 배출해 냈고 최우수지도교원의 영예를 따내곤 하였다. 진심은 통하게 되여있다는 도리를 잘 체득해가는 길이였다.
황지혜네 반 6학년 조선어문을 맡을 때의 일이다. 그해 부주의로 쇄골골절상을 입고 수술한 뒤끝인지라 몸의 회복이 제대로 못된 상황에서 힘들게 졸업반 조선어문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전국조선족학생 작문경색-”만방컵” 작문경색통지가 하달되였다.
“선생님 신체정황 잘 아는데 참으로 딱한 사정인 줄 잘 아는데 어쩌겠습니까? 경색엔 참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께서 힘드신대로 애들 글짓기를 지도해 주세요. 글짓기지도는 애들을 집에 불러다 집에서 해도 됩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학교령도앞에서 나는 더 할말을 찾지 못하고 령도들의 뜻에 따라 애들 글짓기지도를 떠메기로 약속하였다. 평상시 교학에서 닦은 내공과 반달가량의 짧은 시간의 피타는 노력을 거쳐 끝내 황지혜학생은 “만방컵” 특등상을 획득하였고 나도 따라서 특등지도상을 수여받게 되였다. 노력과 성공의 정비례관계를 잘 터득해가는 길이였다.
이때쯤하여 누군가 나를 깨우쳐주는 사람이 있었다.
“애들 글을 그렇게 잘 지도하고 애들 랑독도 그렇게 잘 지도하는데 왜 자기 글은 못 발표하고 자기 랑독은 과시 안합니까? 자기 꿈도 꾸고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니 참도 의리맞는 말이였다. 조선어문교원으로서 조선어문령역에서 응당 애들의 솔선모범이 되여야 하지 않을 가. 그때부터 애들 글지도, 랑독지도와 함께 나의 글도 쓰기 시작했고 나의 랑독제고에도 본질적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한국 KBS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방송에 나의 글 두편과 애들 글 네편이 련속으로 우수상에 당선되여 방송되였고 중국조선어방송에도 7편의 나의 글이 방송되면서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신심을 더욱 가지게 되였다. 그뒤로 꾸준한 학습과 파고드는 정신으로 노력을 경주한 결과 민족문학을 비롯하여 연변문학, 장백산, 송화강, 도라지 등 잡지들과 여러 신문들에 륙속 나의 글들이 실리고 애들 글도 흑룡강신문, 길림신문에 자주 게재되였다. 한쪽으로는 “아침을 열다”란 나의 첫 시집도 한국에서 출판되여 세상에 고고성을 터뜨리게 되였다. 씨앗은 뿌려야 했고 열매는 잘 가꾸어야 성공의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어제도 랑독준비로 부지런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애들의 동시조 14수가 소년아동에 발표되고 두만강 청소년시화전에서 우리 애들의 동시가 은상, 동상의 영예를 받아안았다는 좋은 소식이 전달되였다. 마음에 댕겨서 하는 일은 언제나 속도가 났고 효률이 좋았다.
그렇다. 나는 조선어문교원이다.
조선어문교원으로서 매 과당 조선어문교수를 훌륭히 완성하고 우리 글로 된 글짓기를 훌륭히 지도하고 우리 말 랑독, 랑송, 이야기를 훌륭히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나의 본직이 아니겠는가! 또 조선어문교원으로서 자기부터 학생들의 솔선모범되여 우리 말과 우리 글을 훌륭히 익혀가고 전파해가고 공유해가는 것이 나의 천직이 아니겠는가! 지나온 인생에도 조선어문교원으로서 그렇게 살아왔거니와 앞으로의 인생에도 조선어문교원의 키를 단단히 부여잡고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이어가는데 한몸을 불태워 갈 것이다.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꽃에 있다지만 꽃을 받쳐주는 든든한 줄기와 꽃을 지켜주는 든든한 가시가 없다면 어찌 꽃의 아름다움을 운운할 수가 있겠는가! 꽃이 우리 민족의 얼로서의 우리 글과 우리 말이라면 나는 달가이 꽃을 떠이는 줄기가 되고 꽃을 지키는 가시가 되리!
심사평
응모글 제22편 심사평「나는 조선어문 교원이다」 심사위원 서옥란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산재지역에서 우리 말과 글을 꽃피우다
수기가 정서적 고양과 큰 울림의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진실성과 동시에 문학적 속성을 일부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글쓴이의 감수성과 그것을 이야기로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30여 년의 교직생활 경험을 이야기에 담아 진정성 있게 담아내고 있으며 조선어문 교사로서의 자신의 소박하면서도 굳건한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꾸준한 노력과 변함없는 리상을 가지고 민족의 교육사업에 무한히 헌신한 일이 얼마나 보람있고 빛나는 일이였는지 잘 엮어내고 있다.
19살 꽃나이에 시골 조선어문 교원으로서 여러가지 역경에 부딪쳤을 때 저자에게 힘을 준 것은 바로 변함없는 신념이였다. “내가 이를 악물고 일어선 것이 곧바로 조선말 교육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고 순종시키겠다는 결심이였다.” 이와 함께 애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해낸다. “단지 조선어문의 교사만이 아닌 력사, 생활풍속과 전통 등 민속문화까지 포함한 다양한 이야기를 넣었더니 아이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저자의 교수방법에 대한 자신만의 사유와 실천을 보여준다.
저자는 학생들의 글짓기 수준제고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기부터 동시, 동요까지 지도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아이들의 심리적 변화를 파악해 고민을 해결해 주고 그들과 심리적 소통까지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랑송, 랑독대회 등 실천적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여러가지 상을 수여받고 애들의 자신감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시대적 특색이 있는 다양한 교수방법을 개척함으로써 조선어문 교사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를 전수하고 이어가는 실천가로 활약한 것이다.
사랑과 열정이 없이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지겠는가.
저자는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일은 자신의 “천직”이라고 한다. “꽃이 우리 민족의 얼로서의 우리 글과 우리 말이라면 나는 달가이꽃을 떠이는 줄기가 되고 꽃을 지키는 가시가 되리! ”
저자는 꽃과 줄기와의 관계라는 예술적 표현을 통해 남은 평생을 계속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 땅의 교육현장에서 몸 담고 있는 평범한 교원의 평범하지 않는 삶을 통해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조선어문 교사의 의지와 집념을 낱말 마다에서 쏟아내고 있다.
이 글은 교육의 현장성을 중심으로 과감한 실천의지와 보람된 성과들을 진술하는데 의욕을 보이면서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하지만 민족학교의교사, 특히 조선어문 교사로서 인재양성에서 여러가지 오류와 시행착오, 아픔과 좌절을 더 많이 겪었을건데 그런 부분을 조금만 더 다루고 어떻게 극복했는지까지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면 체험이 균형을 이루고 감동을 더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기업 협찬 배너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
【수상소감】허해란내게 따뜻한 봄날이
[딸아이와 우리글 공부] 이 글을 쓰기전까지만 해도 저는 드라마에 빠져서 남들이 글을 쓴다는 것과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이 글이 2022년 5월 22일에 입선하기전까지는 말입니다.
저는 제가 고민하고 겪었던 진실한 이야기를 써서 독자들과 나누면서 공감하고 싶었습니다.
글을 다 쓰고 제가 쓴 글을 읽어줄 독자가 없을가봐 주저하기만 했습니다.다른 분들의 글에는 박식함과 독서를 많이한 향기와 글에서 팍팍 풍겨오는 오랜 노하우와 내공이 느껴졌기때문입니다.
저의 글에는 화려한 수식어도 없는 평범한 글이였습니다. 그만큼 제가 책을 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즘 재미있는 글이 많은데 누가 시간랑비를 하면서 두서없이 쓴 긴 글을 읽을가? 솔직히 자신이 없어서 보낼가 말가를 보름동안 고민했습니다.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되던 안되던 일단은 글을 보내라고, 결정은 심사위원선생님들이 하는거라고, 응원해준 덕분에 용기를 냈습니다. 그 친구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의 미흡한 글이 뜻밖에 입선되고 계정에 나가서 의외로 많은 조선족 엄마들이 공감을 해주면서 반응이 좋았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중시하게 되였습니다. 상해조선족주말학교에 애들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광동에서 상해조선족 주말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키는 사례도 있었고 제 주변의 친구들이 이 글을 읽고 아이들한테 우리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단말을 듣고 글 쓴 보람을 느꼈습니다.
글이 입선된 후 저한테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드라마에서 빠져나와서 어느새 제 손에는 책이 손에 쥐여있었고 저는 조금씩 독서를 하면서 글 근육을 키우면서 글쓰기 련습을 하면서 조금은 더 진하게, 조금은 더 향기롭게, 조금은 더 진솔한 좋은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처음으로 쓴 글이 수상을 접하고 며칠동안 꽃길을 걷는 행복감에 젖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타지에서, 외국에서, 치렬하게 열심히 피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우리 조선족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저도 그속의 한 일원이 되여서 같이 참여할 수 있어서 더더욱 행복했습니다.
초보인 저한테 성장의 기회를 마련해주신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후원단체 기업, 개인 그리고 협찬해주신 고마운 분들과 로고를 아끼지 않은 편집선생님, 심사평을 이쁘게 써주신 김학송 심사위원선생님, 고운 목소리로 랑독해주신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시간을 할애하여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고 댓글을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글과 우리언어 우리 문화를 지키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번 저를 격려해주고 응원해주신 모든분들께 수상의 영예를 돌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응모글 제26편】딸아이와 우리말 공부저녁 노을
글: 허해란 랑독:장련 음악편집:변소화
아이가 태여나서 유치원에 가기전까지 나는 나의 모어인 우리말로 아이와 대화하면서 우리말을 집에서 가르쳐 주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한어보다 우리말이기도 했고, 우리말을 알면 고향에 있는 친척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수 있고 아이의 정체성 확립에도 도움이 될거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재잘재잘 말하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조선족 엄마로서 언제나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보통 대도시에서 거주하는 조선족 가정에서는 어릴때부터 아이한테 당시 백수를 외우게 하고 한어로 대화하는 집안이 많다. 어릴때부터 미리 한어를 가르쳐야 학교에 가서 언어소통에 지장이 없이 어휘력이나 문장 구사능력 또는 사자성어를 잘 익힐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나는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면 우리 문화와 민족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우리 조선족은 두가지 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축복받은 민족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아이한테 고스란히 전해줘야 하는 책임감은 전적으로 부모한테 있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우리문화를 대대손손 후세까지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유치원에 붙으면서 하루종일 한족 선생님, 한족 애들과 한어로 대화하니 우리말을 점점 잊기 시작하였고 우리말로 묻는 말에 우리말로 대답하기조차도 어려워했다. 그렇게 소학교 2학년이 되니 말문이 막혀버리면서 아예 벙어리가 되여버렸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로심초사하면서 우리 아이한테 우리말을 가르쳤는데 …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나면서 나는 좀처럼 우리말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조선족이 밀집되여 살고있는 연변의 자그마한 변방도시에서 태어나, 평범한 조선족 가정이지만 어릴때부터 우리말을 배우면서 자랐다. 그때는 장국에 배추김치를 찢어서 먹어도 구수한 우리말이 있어서 가난했지만 항상 행복했다. 특히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가진 구수하고 감칠맛이 나게 표현하는 우리말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뜨끈뜨끈한 가매목에 날래 앉아서 손가락과재랑 옥시티개랑 해자블까면서 나누어 먹깁소 ”
“이매 피두 채 안마른 선선아 대여섯이 구새통옆에서 담배를 피우메 휘파람 불면서 창가를 하메 놀잼두?”
“공부를 써거 답새긴다”
“저 남자애 입은 옷이 와늘 쥑임다”…
이렇게 사투리까지 섞인 우리말은 어릴때 어머니가 끓여준 슝늉처럼 구수하다. 집에 전화기도 없었던 그 시절, 나는 공중전화박스앞에 가서 청년생활, 연변녀성 등 우리말 간행물들을 사서 읽은 후 친구들한테도 빌려주기도 했었다.
그후 나는 남보다 일찍 대도시에 나와서 부평초처럼 살았다. 고향 연변을 떠나서 상해 포동에 자리잡고 살면서 처음 길에서 조선족을 만나서 우리말을 할때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처럼 우리말에 대한 갈증으로 목이 말랐던 것이다. 처음 만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나는 수없이 그동안 못했던 우리말로 그녀한테 내 이야기를 늘어놓군 하였다. 17년전 포동에는 조선족이 그리 많지 않을 때였다.
어려서부터 배운 우리말이 그리워서 처음으로 조선족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면접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면접보러 왔습니다.”
“ 방갑소 ~ 연변에서 왔구나. 나도 연변사람이요.”
나의 이력서를 훑어보면서 사장님이 정겨운 우리 연변말로 반갑게 맞아주니 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하기도 했었다.
면접에 무사히 통과된 나는 입사후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마음껏 우리말을 하면서 세상에 부러운 것이란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좋은 상사와 동료들을 만난 것이 나의 복이라면 복이었다. 외지에서 한족들을 자주 만나다보니 그들은 내 서툰 한어 말투를 듣고 어디 사람인가 묻군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조선족은 아리랑 노래를 부르고 이쁘고 깨끗하고 특히 조선족 여성은 온화하고 현처량모형이 많습니다 ”
내가 만난 한족들은 조선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높히 평가하면서 가끔 조선족여성을 흠모하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왜 그리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아이가 소학교 3학년이 되자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더 늦어지기전에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워야 했다. 어릴때 배우지 않으면 커서는 더 배우기 어렵다. 어린 아이들은 이중 언어 구사자가 될 능력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여난다고 한다. 우리말을 배워주는 학교는 없을가? 내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구세주같은 조선족 주말학교가 나타났다.
2010년 10월 16일에 설립한 상해조선족주말학교는 학생들에게 우리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대부분이 한국인이였고 선생님들중 서울대석사학위를 받은 조선족선생님들이 여러명 계실 정도로 교수진은 탄탄한 실력을 갖추신 분들이었다.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력과 청춘을 바쳐서 타지에서도 우리 민족의 언어를 지켜가고 있었고 한국어 중국어 영어를 모두 구사할수 있는 조선족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같은 상해에서 우리말을 가르치겠다는데 굳이 싫다면서 한족들처럼 한국에 류학을 보내어 몇십만이라는 비싼 학비를 팔 필요가 있을가?
박형군교장선생님은 “애들이 소학교 6학년만 졸업하면 우리글을 읽고 쓰고 하는데 전혀 문제 없습니다. 아이들은 우리 학교만 졸업하면 어디나가서도 자랑스러운 조선족으로 거듭나갈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우리말은 마치는 교장선생님의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와 같았다.
딸아이는 매주 토요일마다 늦잠을 자지 못하고 주말학교를 다니면서 하루에 2시간씩 공부를 하였다. 타지에서 아이들을 우리말 공부를 시키려고 온 학부형들이 의외로 많았다. 학교는 민항구 룽바이2 촌안에 교실을 빌려서 수업을 했는데 포동, 칭푸, 송강, 곤산에서 온 학생도 있었다. 운전해서 왕복 3시간반이상의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아이를 조선족 주말학교에 보내는 부모님들의 열정에 나는 탄복을 했다. 앞으로 조선족의 미래가 보이는 같아서 마냥 설레이기도 했다.
딸아이가 다니는 반급에는 학생이 20여명이 있었고 20여개 반급이 있었다. 나는 아이를 주말학교에 보내놓고 그제야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바쁘다는 핑게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시간집중은 잘 하는지, 공부는 잘 하는지, 숙제는 하는지, 한번도 확인한적이 없었고 기계적으로 학교에 보내기만 하였다. 반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아이더러 교과서 과문을 읽어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이는 한줄도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것이였다. 반학기동안 배운 공부가 나미아미타불이 되였다. 나는 할수없이 아이를 아래 학년에 내려앉히고 다시 배우게 하였다. 한달 후 다시 아이가 공부를 하는 것을 확인해 보았는데 일정한 시간만 지나면 한줄도 읽어내려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알고보니 딸아이는 일주일에 2시간만 공부하다 보니까 그동안 배운 내용을 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내여준 숙제를 전혀 하지 않고 집에서 복습도 시켜주지 않으니 다음 주 주말학교에 갈 때는 지난 주에 배운 과목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리가 자랄 때는 하루종일 학교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우리말을 했고 집에 와서도 동네에서나 티비에서 우리말을 접할 수 있으니 학교에서 배운 말과 글들은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타지에서 자란 아이들한테는 주변환경이 허락하지 않아 심지어 우리말을 영어를 배우기보다 더 어려워했다.
한 학기가 지나니 같이 다니던 애들이 차츰 보이지 않았고 반급의 학생 수가 눈에 띄게 현저히 줄어들었다. 길에서 같은 반급 다니던 학생 학부형을 만났다.
“애가 주말학교에 안나오던데...웬일이에요?”
“우리말을 배워서 어디에 써먹어요? 요즘 경기가 안좋아서 상해에 한국회사가 절반이상 철수하고 문을 닫았어요. 이젠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취직이 어려워졌어요. 우리애들 세대에 한국회사에서 어디 취직이나 하겠어요?”
“취직을 위해서 우리말을 배우는게 아니잖아요? 조선족으로 태여났으면 우리말도 할줄 알고 우리 글도 알아야 조선족이라고 할수 있지요. 신분증에 조선족이라서 번듯하게 써있어서 조선족이라고 할수 없어요. 우리 애들이 조선말을 할줄 모르면 앞으로 우리민족이 없어져요.”
그는 내 말을 귀등으로 들었는지 웃으면서 “그 시간에 영어학원을 보내는게 더 나아요.”라고 했다. 자기 민족언어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 언어를 기를 쓰고 배우는게 나로서는 조금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마다 아이를 양육하는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옆에서 뭐라고 할수 없는 노릇이였다.
그 즈음 같은 반 학부형을 여러명을 만났는데 너무 멀어서, 애가 싫어해서, 영어학원때문에, 애가 재미없어 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서...등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우리말을 배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견지를 하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우리 후대에서 언어가 사라지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민족의 뿌리는, 우리의 문화는...나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이대로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를 또 다시 아래 학년에 내려앉힐 수 없어서 나는 모든 과외를 다 끊고 편안하게 우리말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나섰다. 주말학교에서 배운 숙제를 무조건 시키고 검사를 했고 낮에 배운 과문을 세번씩 읽게 하였고 단어를 5번씩 쓰게 하였다. 그랬더니 딸아이는 과문 세번을 읽고나서 목이 아프다고 하고 글을 쓰라면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다면서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학교 숙제가 많아서 부담되는데 왜 주말학교 공부까지 해야 되냐면서 내게 빡빡 대들었다. 우리말, 우리말이 도대체 머냐고? 하면서 …
우리말이 기억하기 힘들다고, 하기 싫어서 포기하겠다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내가 아이를 너무 힘들게 닥달한거 같아 미안해지기도 하였다. 교장선생님 말대로 딱 6년만 견지하자,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자, 언젠가는 엄마가 제일 잘한 것이 내가 엄마한테서 언어를 물려받은 것이라고, 그것은 돈을 주고도 살수 없는 값진 재산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매주 토요일 저녁은 모음과 자음, 받침을 읽고 쓰게 하였다.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도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수 있다는 훈민정음은 우리글을 간단히 익힐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게 아니었던가.
꽃밭 [ 꼳빧 ] , 시작해요 [ 시자캐요 ] , 특별활동 [ 특뼐활똥 ] , 옷이야 [ 오시야 ] , 잃어버리지 [ 이러버리지 ] , 있겠어 [ 읻께써 ] , 똑같은것 같아요 [ 또가튼거 가타요 ]…이처럼 읽을 때와 쓸 때 다른 글을 받아쓰기 하면 아이는 굉장히 어려워하였다. 과도한 훈련보다는 딸아이와 같은 눈높이에 맞추어 천천히 꾸준히 견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았다. [ 소곤소곤 ] [ 수군수군 ] [ 방글방글 ] [ 뾰족뾰족 ] [ 방실방실 ] [ 조곤조곤 ] [ 울긋불긋 ] [ 아장아장 ]... 아 , 얼마나 표현력이 풍부한 우리말인가. [ 선생님과 문화를 배워요 ] 는 매 과목마다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었고 비교적 길다보니 매번 내가 읽어주고 낱말 뜻풀이를 구체적으로 해주면서 아이와 다시 언어 연습을 하는 기쁨과 흥취를 느꼈다. 그처럼 나는 지칠줄 몰랐다.
2020년 코로나가 터지면서 우리는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수업을 하였다. 학교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온라인 반급 목표는 100개이고 수업의 퀄리티를 보장하기 위하여 반급별 학생수는10명으로 제한했다. 학교는 전국각지 조선족어린이들의 온라인 수업방식으로 우리말 우리글을 배울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주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인터넷만 된다면 북경,강소성, 절강성,심천 등 전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은 수업에 참가할 수 있었다.
온라인 수업의 시간은 1시간이였는데 의외로 집중력이 엄청 높았다. 딱 한달 했는데 한주 ( 1회 모두 4시간) 딸 아이한테서 큰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어느날 갑자기 딸아이는 교과서 과문을 뜯어서 읽기 시작하더니 줄줄 내리읽었다.
“시험 보는 날 미역국을 먹으면 안돼요”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미역이 미끄러워 시험에서 떨어진다”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이였다. 글을 먼저 배우니까 말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차츰 아이는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한어로 영어선생님과 영어로 집에 와서는 우리말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다양하고 풍부하고 이쁜 언어를 더 잘 배우는 방법은 없을가? 부모랑 친구랑 더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대화하는 방법은 없을가?
아이의 우리말 실력을 조금 더 제고하기 위하여 나는 고민끝에 지난해부터 아이와 함께 세계를 강타한 한국드라마 ”오징어 게임”보기 시작하다가 “기황후” “ 태양의 후예”“사랑의 불시착” 같은 중국어 자막이 나오는 드라마를 같이 감상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인물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눈으로, 입으로, 귀로, 머리로, 마음으로 편안하게 즐겁게 한국어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말을 배우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드라마를 감상하면서 나는 아이의 순수하고 맑은 내면세계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기도 하였다.
“이정혁동지 세리동무를 좋아하재? 이정혁동지 우추부레 하구나. 와 ~ 여자한데 뽀뽀를 하면서 ”“행복 하시라요”“알갓소” 아이는 가담가담 드라마속 북한 말투를 배워서 나를 웃게 하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는 나도 부르지 못하는 한국드라마 주제곡을 외울 정도로 한국음악에 흠뻑 도취되였다. 아이는 한국노래가 중국노래보다 곡이 더 듣기 좋다면서 한국과 중국노래의 구별점을 내게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어느날 아이는 한국노래를 부르다가 가사를 보면서 “엄마, 나 여기 나오는 한국글자를 다 읽을수 있어요. 너무 간단해요.” 라고 방방 뛰면서 신이나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덕분이에요. 엄마는 주말학교 선생님해도 되겠어요.”라고 하면서 나를 잔뜩 칭찬해주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돌중에서 BLACKPINK 를 제일 열광했다. 2016년에 데뷔한 그룹인데 외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들의 생일이며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무릇 BLACKPINK 가 부른 노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밥상에 마주 앉아서 부르기도 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흥얼거리는 그야말로 못말리는 팬이였다. 그렇게 딸아이는 12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국어 숙제를 하다가 아이는 이런 질문을 했다.
“엄마는 내가 왜 우리말을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조선족이라서, 엄마 딸이라서 무조건 배워야 된다고 그외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
“있지 , 있구 말구 ~ ! 엄마는 지영이가 엄마 배속에 있을 때 일기를 썼어. 태여나서 첫돐 쇠기까지… 너의 성장이야기가 적혀있어.”
“그럼 엄마가 읽어주면 되겠네요.”
“니가 우리글을 잘 배워서 너 절로 읽어. 그건 너의 이야기이니깐.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리고 엄마는 글도 하나 쓰고 싶어. 지영이가 엄마 첫번째 독자가 되여주렴.”
“우리글을 견지해서 잘 배우고 엄마가 쓴 일기도 읽고 엄마 첫 글 독자가 되여줄게요.”아이는 나와 손가락깍지를 걸고 대답을 했다.
우리글을 더 잘 배우려는 동력이 생기자 아이는 우리말 공부에 애착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를 했고 나는 우리말로 된 공식계정에 올라온 영상시를 아이와 같이 들으면서 아이에게 우리말로 지속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올해 3월초부터 갑자기 터진 코로나로 인해 상해는 몇달동안 아파트들을 봉쇄하고 채소나 과일을 사러도 아파트 대문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전체 상해시내가 비상으로 정지상태가 되였다. 시민들은 철창이 없는 감옥생활을 몇달동안 보냈고, 봉쇄기간 냉장고 안은 감자 한톨 없이 언녕 텅텅 비였다. 주민위원회에서 나누어준 물자는 량이 너무 부족해서 간신히 끼니를 에때울 수 밖에 없었다. 간혹 새벽에 일어나서 메이퇀이나 띵뚱앱에서 채소를 사려고 해도 1초만에 다 팔려서 없었다. 이러다 멀쩡한 사람들이 먼저 병에 걸려서 죽을 것 같았다. 직장생활을 한다면 매달 나오는 월급으로 돈 걱정이라도 덜하겠는데 장사를 시작한 나는 택배가 정지되면서 수입이 0이 되였다. 돈 걱정에 먹을 걱정에 늘 가슴을 조이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시기였다.
매일 몇만명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확인하고 상해를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깊은 나락에 빠졌다.이대로 상해에 살아남을 수 있을가?
내 생일날 아이는 나한테 생일 카드 한장과 핸드폰 위챗으로 빨간 봉투를 보내주었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저를 낳아주고 이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를 잘 이겨내세요. 엄마, 사랑합니다.”
카드에 우리글로 손글씨로 축하의 메세지를 보내준 딸아이가 너무 대견스러워 꼬옥 안아줬다. 그 순간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고마워 내 딸 ~ 엄마도 우리딸 사랑해 ~아주 많이 ~ ”
그동안 우리글을 가르치면서 함께 했던 기억들이 영화장면처럼 떠올랐다. 딸애의 우리글로 쓴 축하메세지가 내게는 큰 위로가 되였고 코로나 비상시기를 잘 버틸 수 있었다.
얼마전 아이는 우리글 숙제를 하면서 말했다.
“엄마, 저는 앞으로 우리글을 열심히 배워서 중한번역관이 되겠어요.”
“니가 그림을 잘 그려서 미술쪽으로 발전한다면서 목표를 바꾸었어?”
“번역관이 돈을 더 버니깐요.”
아이는 신나서 말했다.
“돈을 더 잘 버는 일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더 행복하단다. 엄마는 우리딸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우리말 덕분에 아이와 관계가 좋아졌고 소통이 더 원활해졌고 항상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말투도 부드러워진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작 더 어렸을때 우리말을 가르칠 걸 그랬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 언녕 주말학교를 졸업했을텐데 말이다. 나와 아이사이를 더 돈둑해지게 해준 우리말이 고맙다. 3년만 더 공부를 하면 주말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 이제 곧 사춘기를 맞이할 아이를 인정하고 대견스레 바라보면서 온전히 아이를 잘 키울 자세가 되여있다. 엄마의 성급함을 뒤로 하고 아이앞에서 먼저 달리지 말고 아이의 뒤에 한발 물러서서 잘 커가는 아이 모습을 사랑으로 밀어주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요즘 딸아이가 유난히 좋아 하는 시가 있다.
서시
윤동주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딸아이가 이 시를 몇번 읽더니 줄줄 외우면서 랑독을 어찌나 잘하는지 너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시인 윤동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말과 우리글을 잊지 않고 끝까지 지켜 찬란한 문화유산을 세상에 남겼다. 우리 세대, 우리 후세들도 우리말과 우리글 그리고 우리 조선족 문화를 사랑하고 그 소신과 명맥이 세상 어딘가에 고스란히 뿌리 내렸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보면서 이 글을 끝낸다.
심사평
응모글 제26편 심사평「딸아이와 우리말 공부」 심사위원 김학송 시인, 국가1급작가
허해란씨의 응모글 “딸아이와 우리 글 공부”는 모어에 대한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간절한 마음을 담아낸 글이다.
“조선말 할줄 모르면 우리 민족이 없어진다”는 위기감을 안고 딸애의 한글공부에 정혼을 쏟는 작자의 모습이 글의 행간에 잘 드러나있다. 민족의 정체성과 뿌리를 기어코 지키려는 확고한 의지가 구체적 서사를 통해 드러나면서 깊은 공감을 준다.
조선족주말학교를 “구세주”로 비유하고 우리 글을 “우리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로 표현할 만큼 우리글에 대한 작자의 사랑은 남다른데가 있다. 중. 한 번역관의 꿈이 자라고 있는 딸을 기뻐하는 작자를 보며 독자들도 그 기쁨을 공유하게 된다.
“우리 조선족은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구사할 줄 아는 축복 받은 민족이다” , “우리 글의 존재와 우리 민족의 미래는 전적으로 학부모들한테 달렸다”는 각성과 깨달음에는 어떤 절박감을 내면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삶의 진실앞에 마주선 작자의 정신세계가 드러나있어 좋다. 모어에 대한 백열화된 사랑의 결정체여서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가 강하고 뜨겁다.
주제를 에워싸고 군더더기 없이 조리있게 엮어진 글을 보면서 우리 민족과 우리 글과 우리 문화를 한없이 사랑하는 작자의 순결한 마음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은 결국 작자의 마음의 그릇안에서 나오므로 더 좋은 글을 써낼 잠재력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바탕으로 형상능력을 좀 더 키워나가면 금후 훌륭한 작가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기업 협찬 배너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
【수상소감】현애옥잊지 못할 시상식
2022년 11월 3일, 한국에서 일본으로 온지 옹근 한달만에 나는 세계조선족글짓기대회 시상식에 참가하게 되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동경의 화창한 날씨는 고향 연변과 달리 아직도 파아란 나무잎들이 초록을 뽐내고 있다. 나는 오래만에 단정한 의상을 갈아입고 들뜬 기분을 달래며 시상식 장소로 향했다.
한시간 십분의 지하철 로정으로 지도를 검색하며 이 나이에 혼자서 낯선 일본땅에서 이바라기현 도리데시란 목적지를 찾아 갔다는 것이 마음이 뿌듯했다. 역시 마음이 젊어야 인생도 보람있지 않을까 싶다.
회의장에 들어서니 세계조선족글짓기대회 시상식이란 프랑카트가 한눈에 안겨오고 더불어 일본조선족문화협회 지도자 분들의 성심어린 로고와 일찍 일본에 자리잡고 재능을 마음껏 펼쳐가고 있는 기업가들 중에서 사심없이 이번 행사에 후원을 아끼지 않은 분들을 직접 마주하니까 조선민족의 긍지감을 실감하게 되였다.
더우기 인상깊은 것은 이번에 개최된 세계글짓기대회에 온몸을 불태우며 공헌한 박춘화 위원장님의 열정적인 환대와 첫 시작부터 매 하나의 작품을 한글자도 빠짐없이 읽어보고 응모자들과 소통하고 모든 유관 사무를 빈틈없이 해결해 나간 덕분에 오늘의 성공적인 자리가 마련될 수 있었다는 사적을 들었을때 너무나 감동이였다.
9개월의 대장정을 거쳐 드디어 55편의 우수작품중에서 10여편의 작품이 수상하게 된다. 세계에서 이름있는 조선족 평심원들의 55편의 평심이 조글로 매체에 이미 발표되였고 대회 심사위원회의 빈틈없는 심사를 거쳐 선정되는 장엄한 수상식이였다.
나는 6번 응모자로서 엄마의 마음이란 글로 이번 대회에서 자신의 글 능력을 검증받는 신분이다. 충분한 준비없이 쓴 글이여서 크게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요행을 바라고 있다는 것만은 숨길 수 없는 현실이였다.
시상식이 시작되자 남녀 사회자 두 분의 뜻밖의 대화가 나에게는 깊은 인상과 과분한 만족을 느끼게 하였다. 남녀 사회자 두분이 서로 문답하면서 이번 대회의 전체 응모글 중에서 어느 문장이 제일 인상적인가 물으니 여자 사회자분은 자기는 엄마의 마음이란 문장이 제일 인상적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글은 전 세계 어머니들의 마음을 대변하였고 코로나로 인해 부모자식지간에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애절한 그리움을 도란도란 마주앉아 이야기 하듯이 진실하게 글로 잘 표현했기에 자신도 이 글을 읽으면서 고향에 있는 보고 싶은 어머니를 더 그리게 되고 가슴이 뭉클하면서 제일 인상이 깊은 것 같다고 감명깊게 말하였다.
나는 그 시각 이 자리에서 보잘것없는 자신의 글을 이런 식으로 평가받는 것 만으로도 수상과 상관없이 마음의 만족을 느끼게 되였고 비록 어린시절 문화혁명의 피해를 입어 더 많은 공부를 못했어도 그간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보람을 느끼게 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보며 글쓰기에 애착이 있었지만 젊어서는 팽이처럼 돌며 인생을 살아 오느라고 많은 글을 쓰지 못했고 비록 황혼인생에 들어선 지금에야 글쓰기를 소중히 여기면서 우연한 기회에 처음으로 발표한 문장이 이 정도의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뿌듯하기만 했다.
시상식 발표 결과에 큰 상은 아니어도 격려상이란 영광과 함께 상장과 상금도 받아 안고 한동안은 실감이 안났다. 그보다 나로 하여금 제일 기쁘게 한것은 나의 한 고향 동창생 세명이 이번 대회에서 많은 응모자들을 제치고 함께 수상의 영예를 가지게 되였다는 것이다.
두번 다시 있을 수도 없을 잊지 못할 시상식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였다.
일본조선족경제문화협회의 모든 지도자 분들과 후원해주신 여러 기업가분들 및 조선족 문화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재일 동포들에게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이 기회를 빌어 비록 한번도 만나 본적은 없지만 나의 문장을 감성적으로 열심히 랑독해주신 윤련순 아나운서 선생님과 문장을 좋게 평심해 주시고 또 앞으로의 소중한 지침을 가르쳐 주신 심사위원 김학송 시인님께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리고 싶다.
조선민족의 일원으로서 우리글 쓰기에 더 기여하며 우리글의 향기가 전세계에 오래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그마한 힘이라도 이바지함과 아울러 나의 황혼 인생을 더욱 보람있게 살아가기에 노력하고 싶다.
2022년 11월5일 일본 동경에서
【응모글 제6편】엄마의 마음
글: 현애옥 랑독:윤련순 음악편집:변소화
사랑하는 큰 딸아, 네가 일본에 간지도 어느덧 3년이 다 되여 가는구나. 네가 그곳에 자리 잡은지 얼마 안되는 2020년 1 월11일에 먼 친척의 손을 잡은 내 귀여운 손자들, 9살 되는 지우와 5살 되는 준우가 엄마한테 간다고 연길 공항에서 퐁퐁 뛰고 좋아하며 일본으로 떠나 갈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 넘었구나. 그 때는 내가 금방 따라 가서 애들도 돌봐주고 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나의 옷과 운동화 같은 걸 일본에 보내는 너희들 소포에 함께 넣어 보낸 걸 너도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누가 알았겠니? 그 후로부터 며칠 안되서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코로나19가 폭발하여 전 세계를 휩쓸고 공포에 떨게 할 줄이야. 첫 시작에는 그야말로 총소리 없는 전쟁터 같았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라 지겠지 하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손 꼽으며 바라 왔지만 2년이 지난 오늘까지 좀처럼 사라질 줄 모르고 델타변이니 오미크론이니 하는 병독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전 세계를 불안에 빠뜨리고 자유로운 래왕을 할수 없게 하고 있으니까. 우리와 같은 이산가족들이 서로 보고 싶어도 볼수 없고 체감교류도 할수 없어 애탄 마음을 달래야 하는구나.
사랑하는 내 딸아. 요즘은 일본과 한국의 코로나 확진 수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어서 나의 가슴은 얼마나 조여드는지 모르겠다. 이 2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중국, 일본, 한국 이렇게 세 나라의 코로나 확진 상황 통계표를 들여다 보는 것이 나의 일상에서 떠날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여 있다. 엄마는 중국, 큰 딸은 일본, 작은 딸은 한국에 있으니 언제면 마음 편히 자유로운 래왕 할수 있는 날이 올지 미지수여서 더 안타깝구나. 한국에 있는 네 동생도 잘 보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인정사정 모르고 무시무시한 코로나가 언제 덮쳐 들겠는지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마냥 한시도 시름 놓을 수가 없구나. 너희들이 부디 방역수칙 잘 지키고 코로나 예방 잘 하기를 나는 매일매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다.
중국은 다행히 정부로 부터 엄격하게 관리하고 시민들이 말 잘 들어주며 서로서로 방역 수칙 잘 지키기에 그나마 편히 살수 있다. 특히 내가 8년째 겨울이면 와 있는 중국의 최남단 해남도는 중국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이름나서 장기간 코로나 확진 수가 없고 자유로운 일상 생활을 할수 있어서 아마도 너희들이 이 엄마 걱정 하지 말라는 모양 같구나.
사랑하는 큰 딸아, 세상 엄마들의 마음은 다 같을듯이 너희들도 자식 낳아 키우고 있으니 알겠지만 모성애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단다. 너희들도 좀 더 시간 지나야 더 알겠지만 자식이란 손 안에 있을 때는 애지중지하고 불면 날아날가 쥐면 부서질가 하고 귀하게 키우다가 좀 더 크면 공부를 잘 시키고 교육에 전념해야 하며 집안 살림과 사회 생활하면서 있는 힘 다해 돈을 벌어 대학공부 다 시키고 성가시켜 저마다 가정을 꾸려 살고 있어도 내 나이 70을 바라보고 자식 나이 40대 들어섰어도 내 눈에는 영원한 어린애 같이 보여서 항상 근심걱정 떠날 수 없단다.
너희들이 자랄때는 좋은 가정환경에서 정말 세상에 부럼없이 귀하게 잘 컸었는데. 그렇게 하고 싶었던 대학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 엄마 아빠는 너희들만은 꼭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닥달을 쳤던 것이 아직도 눈앞이 선하구나. 그래도 너희들이 둘다 부모에게 실망주지 않고 공부를 잘 해줘서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삶의 이야기는 저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지만 모든 부모들에게는 내 자식, 내 가족이 위주가 아닐가 싶구나. 온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무탈하고 건전해야 온 사회가 밝아지지 않을까? 한 줄기의 강물이 바다를 이룰 수 없고 수천수만 줄기의 강물이 흘러서 합쳐야만 넓은 바다를 이룰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네가 20년 전 일본에 가 2년 있은 것이 기초가 되여 다시 일본 가서 잘 살아보겠다고 떠나 갔었잖아. 너를 보내고 금방 네 돐이 지난 준우를 맡아보면서 내가 아무리 정성들여 보살펴도 애가 엄마 그리워서 심리 평형 잡지 못하는 걸 보면서 절실히 느낀건데 애들에게는 엄마가 있어야 행복할 수 있겠구나 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였는지, 네가 8개월 만에 무작정 두 아들을 데려간다고 할때 엄마로서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세월에 아무런 부담없이 두 아들만 키우자 해도 입이 삐뚤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들 하는데 너로서는 혼자서 그렇게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솔직히 탐탁치가 않았다.
하지만 굶어 죽어도 같이 굶어 죽고 살아도 같이 살면서 애들만은 꼭 책임 지겠다는 강인한 너의 태도에 나도 그만 머리 숙이고 말았잖아. 하기는 이 각박한 세상에 제 자식도 모른다고 친 할머니, 외 할머니께 맡기고 외국 가서 돈을 번답시고 외면하는 것이 비일비재이고 심지어 아동 유기, 아동 학대 같은 것들이 곳곳에서 끔찍히 나타나고 있는데 너 처럼 아무리 곤난한 상황이 되더라도 자기 자식 끝까지 책임 지겠다는 건 남들이 보기에도 우러러 볼 바이고 엄마로서도 대견하다는 마음은 들었지만 애 하나 만이라도 몇년 후에 데려가면 안될까 하고 심사숙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애들이 가자마자 코로나로 인해 일도 할수 없고 경제 래원 없이 애들을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였겠니? 곁에서 도와 주는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해결이나 하는 것이고 중임을 떠멘 네가 얼마나 막막했을까고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아팠었다.
애들이 가서 얼마 안되는 어느날 네가 큰 애를 혼자 집에 두고 둘째를 유치원에서 데리구 오다가 마트에 들러 좀 늦었는데 날씨가 어두운데다가 공교롭게 정전도 했고 인터넷이 안되니까 9 살난 지우가 공포에 질려서 엄마 전화 안 통한다며 국제 전화비 엄청 나가는 줄도 모르고 중국에 나 한테 전화하고 한국에 이모 한테 전화해서 전화도 못 끊게 하고 울며 불며 난리 치며 우리 엄마 찾아 달라고 해서 내가 애를 달래며 안위시키는 사이 너의 동생이 한국에서 일본에 있는 아는 사람 동원하며 진땀을 뺏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여진다. 그날 저녁 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되면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이럴 때 내가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고 혼자 되뇌였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영어 전공 중점대학을 졸업하고 일어 일급에 중국어와 한국어에 능통하며 여러가지 능력을 갖춘 네가 7년 전까지 만 해도 중국에서 한달 수입 5~6만씩 벌면서 엘리베이터 아파트 세채씩 사놓고 살 때는 그 누구도 부럼없을 것 같더니만 그 후로 장사도 잘 안되면서 이런저런 원인으로 어느 사이 네가 나의 아픈 손가락이 되여 있을 줄이야...... 하지만 너는 언제 한번 신심을 잃지 않고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 참 보기 좋았고 그 무엇보다도 지금 애들이 엄마 사랑 많이 받아 행복해 하는 걸 보면 너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이 엄마는 꼭 믿는다. 나의 큰 딸이 꼭 다시 일어나서 자기 능력 잘 발휘하며 떳떳하게 잘 살 것이며 두 아들한테 자랑스런 엄마가 될거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큰 딸아. 여태껏 코로나로 인해 마음대로 다니기도 불편했었고 그간 애들도 잘 적응시켰으니 집에서 좀씩 돈 벌던 일은 부업으로 하고 오늘 영어, 일어, 중국어, 한국어가 필요한 회사에 면접 본것이 단방에 합격 됐다면서, 참 기쁜 소식이구나. 모든 것은 지나가면 과거가 될 것이고 다만 현실을 받아들이며 신심을 가지고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 만이 현명한 판단인 것 같다. 지금처럼만 애들을 책임지고 잘 키우면 먼 훗날 하늘이 감동되여서라도 너에게 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너희들에게 언제나 훌륭한 버팀목이 되여주셨고 그렇게 아낌없는 사랑을 다 하셨던, 10년전 하늘나라로 가신 너의 아버지께서도 항상 너희들을 응원할 것이다......
만물이 소생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화창한 춘 3월이 다가오니 보고 싶은 나의 큰 딸과 두 손자들이 더더욱 그립구나. 이것이 엄마의 마음인가 보다......
너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고 너의 뒤에는 이 엄마와 동생이 항상 힘이 되여 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
내 딸아 사랑해! 화이팅!
엄마로부터
2022년 2월 22일
심사평
응모글 제6편 심사평「엄마의 마음」 심사위원 김학송 시인 국가1급작가
현애옥씨의 응모글 “엄마의 마음”은 모성애를 주제로 글로벌시대의 어머니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리산의 아픔과 그리움을 군더더기 없는 소박한 필치로 엮어냈기에 모녀간의 따뜻한 정이 독자의 가슴에 훈훈한 느낌을 전해준다. 글 전편에 질펀히 깔린 자식사랑을 통해 “모성애는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작자의 감수를 생동하게 형상화한 점이 돋보인다.
글의 서두에 두 손자가 일본으로 떠나던 기억을 소환하면서 장면화된 서사로 자손들을 향한 뼈저린 그리움을 표출한것이 무척 자연스럽다. 딸이 일본에 가게 된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 전쟁처럼 번지는 팬더믹으로 가족들간의 왕래마저 막혀버린 안타까운 현실, 그 모든 역경을 슬기롭게 헤치며 꿋꿋하게 새 삶을 일궈내는 딸내미에 대한 믿음어린 서선 등 다양한 서술과 묘사를 통해 “가정이 무탈하고 건전해야 온 사회가 밝아진다”는 결론에 도달한 엄마의 각성이 자못 아름답고 거룩하다.
필치는 비록 소박하지만 그 소박함 속에 깊은 진실이 드러난 점이 인상적이다. 이 시대의 질곡, 그리고 부정적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애오라지 자삭사랑 하나로 가슴 시린 고독과 그 모든 아픔에 차분히 대처하는 어머니의 곡진한 마음이 문장의 갈피마다 짙게 묻어난다. 주제를 에워싸고 글이 짜임새있게 엮어졌기에 그만큼 읽기도 편하다. 사랑이 넘실거리는 정다운 편지가 봄비처럼 우리의 메마른 마음밭을 촉촉히 적셔준다.
옥에 티라고 할가?
문장이 다만 엄마의 마음을 전하는데 그치고 깊이 있는 문화적사고로 심미공간을 확장시키지 못한 점이 금후 글짓기에서 넘어야 할 산으로 보인다.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기업 협찬 배너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
【수상소감】최정실감사의 마음과 사명감이란 보물을 받아
수상 소감에 앞서 우선 이번 2022년 Caraz(카라즈)컵 세계조선족글짓기대회를 기획하고 추진한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글짓기 대회를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글짓기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노심초사하신 박춘화 부회장님, 글을 심사해 주시고 심사평 써주신 황유복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심사위원 선생님, 글의 음악편집, 낭독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경례를 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 수상하신 기타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수상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계속 글짓기 하여 수상의 영예를 지닐 것을 기원하며 그동안 함께여서 행복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1월20일에 시작된 글짓기 대회는 수개월이 지나는 동안 저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와중 어느 찰나 세계적인 대회라 관주도가 높고 입선된 글이 세 개의 큰 매체에 발표되어 많은 독자를 만나게 된다는 데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글짓기대회의 소통의 장을 빌어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힘들어 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되찾고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행복하기를 바라는 저의 간절한 마음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응모 마감일 닷새를 앞두고 투고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 보았을 "행복은 신변에 있다"는 도리를, 또 그 누구나 겪었던 "보물 찾기" 이야기를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감화력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대회 심사에 클릭수와 댓글이 가산점이 되어 응모 글들이 클릭수와 댓글로 열기에 넘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솔직히 저의 글에는 어떤 반응이 있을까 하는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부담도 약간 있었습니다.
근데 글이 발표된 후 저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여 많은 분들이 응원에 나섰습니다.
<우리 말 우리 글을 사랑하는 최정실 작가님을 응원합시다> <최정실 작가님의 여기 있었네 보물이...를 읽으면 꼭 원하는 보물을 찾게 될겁니다. 보물 찾으러 작품속으로 들어 갑시다>등의 타이틀로 저의 글을 위쳇 모멘트에 공유해주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가족 위쳇방에 공유하여 한 가족에서 다섯개의 댓글을 올려준 분도 계십니다.
한달 동안 올라오는 댓글을 보면서 정성껏 응원하는 그 하나 하나의 마음에 감개무량하여 목이 메일 때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어디의 누구신지 모르는 한 여성분은 댓글에서 <여기 있었네 보물이...를 읽고 힘들거나 괴로울 때면 주변 사람들에게 툭하고 화를 냈던 자신이 부끄럽다> 하였는데 그 진솔한 댓글은 아마 오래오래 저의 기억속에 남을 것입니다.
이번 대회가 저에게 준 첫번째 큰 선물은 <감사의 마음>이란 <보물> 입니다.
이번에 저의 글을 응원해 주신 한 분 한 분에 대한 저의 감사의 마음은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 말로 이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입선된 55편의 응모글이 모두 나름대로 색다른 빛을 뿜어 심사하기도 참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부족한 글에 격려상을 수여한 것 또한 저에겐 더없는 영광이여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번 대회는 저로 하여금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세상을 마주하게 하였습니다. 이번 대회의 수상은 감사의 마음으로 살려고 하는 저의 삶의 자세에 내린 상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감사의 마음>이란 <보물>을 늘 호주머니에 넣고 시시각각 의식하며 예쁘게 살겠습니다.
이번 대회가 저에게 준 두번째 선물은 <사명감>이란 <보물>입니다.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글짓기, 솔직한 얘기지만 지금까지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돈과 명예를 위함은 더욱 아닌, 내 삶의 '악세사리'로 여겼습니다. 글이 발표되고 그에 대한 조그마한 반응과 성취감에 도취되여 자아만족에 빠지는 협애한 개인주의 울타라에서 놀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글짓기 대회에서 많은 응모글의 댓글을 보면서 글의 거대한 힘을 새삼스럽게 감지하게 되어 어깨가 무거워 지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저 자신이 한민족디아스포라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세계 각국에 흩어진 한민족 후세대들에게 어떻게 우리 말과 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며 타민족과 화합을 이루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사명감을 갖고 진지한 자세로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요리사가 섣뿌르게 덜 익은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대를 통찰하는 보다 성숙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진심으로 저를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11월 7일 최정실 올림)
【응모글 제46편】여기 있었네 보물이…
글: 최정실 랑독:장련 음악편집:변소화
이 세상에 보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작가 알렉산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백작>이 불후의 명작으로 지금까지도 그 인기를 꾸준히 누리고 있는 것은 소설 스토리가 흥미진진한 것이 그 첫번째 원인이겠지만 보물을 좋아하는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보물찾기 모험을 다뤘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어릴적 일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해마다 봄이 되면 원족이라고 해서 들놀이를 조직했었다. 그때마다 보물찾기는 빼놓을 수 없는 놀이였다. 보물찾기는 종이쪽지에 상품명을 적어서 숨겨놓고 그 종이쪽지를 발견한 사람이 해당 상품을 챙기는 놀이였다. 나는 보물을 어디 꽁꽁 숨겨놓았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혹시나 땅을 파고 숨겨놓지는 않았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에 그것도 먼 곳에 가서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하나도 찾지 못한 채 풀이 죽어 돌아오곤 했다. 헌데 같은 반의 먹식이란 친구는 보물쪽지를 곧잘 발견하곤 했다. 그것도 아주 재빨리 여러 개를 찾아냈던 것이다. 내가 부러워 보물 찾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비밀이라고 가르쳐주지 않다가 언젠가 한번 슬쩍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ㅡ 있잖아. 너처럼 먼데 갈 필요가 없구. 가까운데 그것도 아예 안보이는데가 아니구 보일듯말듯한 곳에서 찾아.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걸 난 많이 찾았었거든.
그녀의 말을 들으니 내가 보물을 찾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들이 여섯 살 때인가였다. 아들의 바이올린 공연 덕분에 우리 가족은 동경에 가게 되었다. 그 참에 우리는 디즈니놀이동산을 찾았다. 보물찾기 코너에서 아들은 신이 나서 무조건 어릴 때 나처럼 먼 곳에 달려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보물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참 누가 친아들이 아니랄까봐.
근데 전혀 힌트가 없이 그렇게 기다리다가는 시간이 너무 소요될 듯 싶었다.
ㅡ 여기서 넘 시간 지체하면 다른 코너들이…
시간을 의식하며 내가 남편한테 한 마디 건넸다. 그러자 남편은 가까운 나무밑둥 옆에 500엔짜리 돈을 슬쩍 놓아두고는 아들을 부르는 것이었다.
ㅡ 아들, 너 여기 와 봐!
ㅡ 뭔데요?
숨을 헐떡거리며 아들이 돌아왔다.
ㅡ 아들, 보물이 무조건 그렇게 먼데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 가까운데를 잘 살펴봐. 지금부터 아빠 주변 3미터 반경 이내에서 찾아보렴.
아빠의 말을 듣고 아들은 가까운데서 찾기 시작하더니 이내 찾아냈다.
ㅡ 와, 보물이 여기 있었네.
어린시절 보물찾기에서 늘 헛물만 켰던 나는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내 인생에 공짜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복권 한 장 사본 적도 없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 주변 가까이에는 공짜가 너무 많은 것이었다. 싱싱한 공기며 찬란한 햇살이며 이 기름진 흙과 시원한 물… 결국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공짜가 아닌가. 다시 말하면 최고로 값진 보물은 꼭 돈을 줘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바로 우리 신변 가까이에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항상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성장해서 열여섯 살 되던 해 닥치는대로 독서하던 그가 나에게 어느 날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ㅡ 엄마, 제가 어렸을 때 동경 디즈니놀이동산에서 보물찾기를 했잖아요. 그때 보물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고 하신 아빠의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엔 혹시 길바닥에 진짜 제가 좋아하는 보물을 누가 흘리지 않았나 싶어 자주 고개를 수긋하고 걸었지요. 그리고 다양한 물건들도 많이 주었구요. 근데 말이죠. 점점 크면서 그게 저도 모르게 주변의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고 덕분에 우리 주변에는 아름다운 사물들이 무척 많다는 걸 알게 됐네요.
나는 아들이 보물찾기 놀이를 계기로 이렇게 큰 깨달음이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지라 속으로 못내 흐뭇해났다.
하지만 동경 디즈니놀이동산에서 아빠가 일부러 500엔을 가까운 나무밑둥에 일부러 다 보이도록 슬쩍 놓아두었다는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
육아시기 나는 가끔씩 깨끗이 세탁이 된 아들애의 양말이 빨래줄에 걸려 미풍에 살랑살랑 나붓기는 것을 보면 저도 모르게 행복이 스멀스멀 괴여올라 그 하루 내내 즐거웁기만 했었다.
나는 지금도 500엔 정도의 돈으로 달착지근한 도넛 서너개 사서 이쁜 접시에 담아 온집 식구가 오붓하게 테이블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는 걸 즐긴다. 그렇게 맛있는 것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게 되면 나의 삶마저 도넛처럼 달콤하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아, 진짜 행복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나는 명품 가방을 갖고 있다고 해서 명품 인생이 아니라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충실히 해서 스스로를 <명품>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이야말로 진정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임 같은데 갔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은 여성을 보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꿀꿀해진다. 그것에 신경을 쓴다는 자체가 자신의 품위를 낮추는 것으로 여겨져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때문이다.
보물의 정의를 사전식으로 풀이하면 귀한 값진 물건이라는 뜻이다. 귀하다는 것은 흔치 않다는 말이고 희소하면 자연 값어치가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보물이란 굳이 금은보화일 필요가 없으며 아무에게도 없는 나만의 것이야말로 알짜배기 보물이 아닐가 싶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나 자신과 나의 가족, 친지, 친구 그 모두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값진 존재라는 것을 자주 망각하고 산다. 물질적인 화려함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말이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가까운 친척친구들도 여간해선 만나기가 어려운 요즘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코로나19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과 자기 주변을 둘러볼 충분한 시간을 준 것 같아 고마운 생각마저 든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로에게 더 집중하고 서로를 더 잘 알아가고 서로에게 더 잘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는 등 과거 우리가 많이 잊고 살았고 흘리고 살았던 소중한 것을 마침내 보물찾기처럼 찾아낸 기분이다. 항간에서도 코로나시기 자택근무가 일상화되면서 부부 사이의 금슬이 더 좋아졌다는 얘기도 있는 것을 보면 이혼률이 높은 요즘 같은 시대에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 해야겠다.
지금 내 소중한 사람이 바로 곁에 있는데, 행복은 이렇게 내 안에 자리잡고 있어 손만 뻗으면 언제든지 쉽게 가질 수 있는데, 과거에 연연하고 불확실한 먼 곳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불필요한 방황을 끝도 없이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실로 생각들을 여며볼 일이다.
심사평
응모글 제46편 심사평「여기 있었네 보물이...」 심사위원 이동렬 소설가, 언론인,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보물찾기" 비결을 통해 행복을 찾는 삶의 "진수"를 보여줘
"인간은 욕망한다"는 명제가 있다.
한국의 이성재 작가는 "인류의 역사는 인간 욕망의 상징인 보물과 얽힌 역사"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보물을 열망하고 그 열망을 부채질하는 노림수가 통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흔히 "볼물찾기"로 시작해서 "보물찾기"로 죽음을 맞게 되는지 모른다. 재물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으뜸가는 "보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을때까지 그런 "보물찾기"에 목을 매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것만이 삶의 정답일까?
최정실의 수필 "여기 있었네 보물이..."는 그런 욕망에 반해, 역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위에서 놓치고 있는 "보물찾기"를 통해 "최고로 값진 보물은 꼭 돈을 줘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바로 우리 신변 가까이에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항상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즉 "보물이란 굳이 금은보화일 필요가 없으며 아무에게도 없는 나만의 것이야말로 알짜배기 보물"이라며, 우리의 "일상에서 나 자신과 나의 가족, 친지, 친구 그 모두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값진 존재(보물)"이라고 "보배찾기"의 정답(주제)을 문학적으로 생동하게 풀어냈다.
수필은 그냥 붓가는데로만 쓰는 글이 아니다.
"달관된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 된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편안하게 풀어낼 때"만이 "붓가는데"로가 씌어진다. 작자는 적어도 "보물찾기"에서만은 "달관된 통찰과 깊은 이해"를 갖고 "붓가는데로" 쓴 것 같다.
소학교때 봄이 되면 원족을 가서 보물찾기를 한다. "나"는 "보물을 어디에 꽁꽁 숨겨놓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것도 "먼곳"에 가서 찾다보니 하나도 찾지 못한다. 보배찾기 능수 "먹식이"란 친구가 "나"에게 "먼데 갈 필요"없이 "가까운 곳, 보일듯 말듯한 곳에서 찾으라"고 알려준다. 이에 계발을 받은 "나"는 훗날 여섯 살난 아들한테 “보물찾기” 비결을 전수해준다. "보물이 무조건 그렇게 먼데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까운데를 찾으라"고. 그후 아들은 장성하면서 보물을 찾듯 "주변의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한 덕분에 "우리 주변에는 아름다운 사물들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고백한다. "나"도 "싱싱한 공기이며 찬란한 햇살, 기름진 흙과 시원한 물..."등이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필요한 공짜", "최고로 값진 보물"이란 것을 깨닫는다.
육아시기 "깨끗이 세탁이 된 아들애의 양말이 빨래줄에 걸려 미풍에 살랑살랑 나붓기는 것"을 볼 때의 즐거움, "500엔 정도의 돈으로 달착지근한 도넛 서너개 사서 이쁜 접시에 담아 온집 식구가 오붓하게 테이블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는 걸 즐거움"은 "명품 가방"을 사서 메고 다니는 여인들 부럽지 않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충실히 해서 스스로를 <명품>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일상에서 나 자신과 나의 가족, 친지, 친구 그 모두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값진 존재(보물)"이라는 것을 깨닳으며 코로나19시기 "우리 모두에게 자신과 자기 주변을 둘러볼 충분한 시간"을 주어 "서로에게 더 집중하고 서로를 더 잘 알아가고 서로에게 더 잘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는 등... 마침내 보물찾기처럼 찾아낸 기분이다"라고 역설한다. "지금 내 소중한 사람이 바로 곁에 있는데, 행복은 이렇게 내 안에 자리잡고 있어 손만 뻗으면 언제든지 쉽게 가질 수 있는데..."하고 "보물찾기"의 비결을 재삼 상기시키며 "불확실한 먼 곳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불필요한 방황을 끝도 없이 하고" 있는 삶의 자세와 세습에 경종을 울려준다.
이 글은 주제가 명확하고 주제를 푸는 과정도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다. 긴긴 삶의 여정을 통해 철리적인 에피소드와 세속에 대해 담론하면서 작자는 시종 “보물”과 “보물찾기”를 매개물로 해서 주제를 표현했다.
수필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글의 무게와 감동이 좌우지 된다. 수필을 쓸 때 생각을 좀더 넓히면 깊이가 더 그려진다는 것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보물이란 굳이 금은보화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보물이란 가족이 땀흘려 거둔 수확과 그것을 함께 즐기는 마음가짐”라고 폭을 넓혔을 때, 우리는 정신적인 “보물”과 물질적인 “보물” 사이에서 편향하지 않고 변증법적인 관점으로 “보물”을 논하며 좀더 깊은 주제를 더 설득력이 있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수필의 언어는 간명하고 논리도 정연하다. 가끔 절묘한 세부묘사를 통해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위에서 얘기했지만 세탁된 양말이 빨래줄에 걸려 나붓기는 장면을 봤을 때의 감수와, 온집 식구가 500엔 정도의 돈으로 도넛 서너개 사서 간식을 먹으며 즐기는 감성적인 묘사가 그러하다. 이런 디테일한 묘사들을 좀더 넣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글을 다 읽고 나면 “여기 있었네 보물이…”란 제목을 돌아보며, 한생을 애타게 보물을 찾아온 작자의 감동과 주제를 한번 더 음미하게 된다.
작자의 지성적인 수필 창작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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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
【수상소감】김경애좌충우돌 한국 생활 제2탄을 꿈꾸며
2022년 카라즈컵 세계조선족 글짓기대회 시상식이 11월 3일 일본조선족 문화회관에서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비록 현장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시상식 영상을 통해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이번 응모를 주최한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일본의 쉼터계정, 중국의 조글로 계정, 한국의 동북아신문의 협력 그리고 후원해주신 여러 단체와 기업가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글짓기 공모부터 시작해 시상식 마무리까지 긴 시간 수고해 주신 주최측 관계자분들과 편집자분들, 아나운서님들 그리고 심사위원님들과 응모작품들을 애독해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
저의 "좌충우돌 한국생활"이 이번 글짓기대회에서 가작상을 받게되었습니다. 더 좋은 작품들도 많았지만 여러분들이 정성껏 남겨주신 댓글과 심사위원님들의 심사평 덕분에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하라는 격려의 메시지로 생각하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번 카라즈컵 세계조선족 글짓기대회를 통해 인연이 되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나이 50에 발표한 응모글이 순번 50번째로(우연의 일치) 세계 각지의 조선족분들께 읽혀지고 전해져서 영광입니다.
금상첨화라고 하면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저의 응모글에 윤련순 아나운서님의 낭독, 변소화선생님의 음악편집에 이어 서옥란 교수님의 심사평까지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번에 응모의 기회와 무대를 마련해주신 덕분에 "좌충우돌 한국생활"은 많은 조선족분들은 물론 한국분들에게 읽혀지게 되었고 격려와 응원의 댓글을 읽으면서 발표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였고 감동의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많은 응모자와 구독자를 글짓기 한마당으로 이끌어주신 박춘화 부회장님께서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추진위원회의 아이디어가 참신했기에 많은 구독자들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작품을 내신 응모자 여러분께서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응모 과정을 통하여 자기 작품을 되돌아보고 조금 더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 창작하기에 노력하겠습니다. 응원에 힘입어 좌우충돌 한국 생활 제2탄을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우리 조선족들이 중국땅에서 지켜온 조선족들만의 문화는 세계 어느 지역에 가 있더라도, 그 어떤 경우라도 본색을 잃지 말고 우리 글로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도 아름다운 우리 글로 표현하고 남겨놓아야 먼 훗날 우리 민족의 역사적 자료가 될 것입니다.
카라즈컵 세계조선족 글짓기대회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들이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고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치유하고 자기성찰을 할수 있는 큰 무대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지켜봐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
이상 수상소감을 마치며 함께 하신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 행복하기를 바라며 문우님들께서는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응모글 제50편】좌충우돌 한국 생활
글: 김경애 랑독:윤련순 음악편집:변소화
“경애씨는 중국에서 왔다면서요?”
나대리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턱을 치켜들고 딴 데를 보면서 건방지게 말했다.
“선입선출이라고 무슨 뜻인지는 알아요?”
새로 발령받고 매장에 나온 나대리는 첫 만남부터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상대방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툭툭 내뱉는 그녀의 말투는 짜증 나도록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애써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잘 알지요, 제가 매장관리 경력 몇 년인데 선입선출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한국에 와서 정착한 지 십 년이 훌쩍 지나서 강산이 바뀌었을 때쯤 되자 나는 한국 생활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한국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매일 아침, 직업소개소에서 전화를 받고 식당 허드렛일 하러 다녔었다. 왕초보라서 날마다 힘들고 지저분한 일만 배정받았는데 늘 식전부터 전날 한껏 어지러워진 화장실 청소부터 해야 했고 비위가 약한 나는 아침 식사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어디를 가도 직원들은 저들이 쉬는 시간에도 냉장고 구석 청소는 물론 가끔은 3년은 묵었을 것 같은 창고 대청소를 시킬 때도 있었다. 아르바이트라고 차별하는 그들이 때로는 얄밉고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외국인이 되어버린 나는 입에 지퍼를 꾹 잠그고 닥치는 대로 일만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는 동대문 근처에 있는 횟집에 홀 서빙으로 배정받아서 갔다. 중국 내륙지방에서 태어난 나는 회를 먹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주방에서 회 접시를 받자마자 나는 날렵하게 손님 테이블로 향했다.
“손님, 회 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회예요?”
“활어회입니다.”
“아니, 그니까 저는 무슨 회인가 물어봤다고요.”
들고 온 쟁반에서 회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던 나는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객석에서 목소리 임자를 찾았다. 좀 뚱뚱한 편인 그 여자는 얼굴에 온통 심술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것 같았다.
“아, 그게…제가…”
여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문뜩 입구에 세워져 있던 메뉴판이 생각났다.
“입구에 있는 메뉴판에 쓰여 있었어요. 싱싱한 활어회라고… 암요, 활어회가 맞습니다.”
“하하하, 웬일이야? 이 언니, 한국 사람 아닌가 봐. 언니, 어디서 오셨어요?”
“호호호, 그러게요. 활어회라고 자꾸 우기잖아요. 활어, 활어, 아이고 배꼽 빠져 죽겠네.”
삽시간에 식당 안은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일행은 물론 옆 테이블 손님들까지 목을 빼 들고 기웃거리다가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람들의 조롱이 담긴 웃음소리는 식당 벽에 부딪혔다가 다시 날아와서 나의 뺨을 철썩 때리는 것 같았다.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으나 신발 바닥에 접착제가 붙은 것처럼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바로 그때, 아침부터 주방에서 분주하게 일만 하던 사장인 듯한 남자가 앞치마에 손에 묻은 물기를 쓱쓱 닦으며 홀에 뛰쳐나왔다.
“죄송합니다. 손님, 이건 광어회입니다. 어서 맛있게 드세요. 좀 있다가 제가 특별히 광어 매운탕을 서비스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손님들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이렇게 말하고는 멍하니 서있는 나의 손목을 끌고 식당 뒷문으로 나왔다. 뒷마당에 끌려 나온 나는 죄 지은 듯 머리를 푹 떨어뜨리고 애꿎은 발끝만 내려봤다.
“일 없슴다. 한국에 온 지 얼매 안돼서 잘 몰라서 그런겐데 기죽지 마쇼. 여기서 바람 좀 쐬고 들어오쇼.”
남자는 머뭇거리더니 한마디 남기고 식당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던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 감사함다, 사장님… 보니까 사장님도 중국에서 살다 왔꾸마…”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람을 좀 쐬고 나니 금방 머리가 맑아졌고 활어는 살아있을 活 자에 물고기 魚 자를 합쳐서 생긴 한자어임을 알아차리고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아이코~ 한글만 봐서 그런 것이지 그까짓 거 한자로 써 놨더라면 금방 알아봤을 터인데…’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좀 전으로 되돌려서 손님들에게 속 시원히 활어라고 하는 한자어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웃어 대던 그들 중 한자어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분명 있으나 따질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다정하게 건넨 연변 말투 한마디에 활어 블랙홀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매일 아르바이트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일을 배웠다. 어디를 가든 항상 최선을 다해서 일하다 보니 얼마 후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설렁탕 전문점 사장의 맘에 쏙 들어서 홀 담당으로 채용되었고 나는 홀에서 여직원들과 하루하루 즐겁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객이 설렁탕 안에 고기가 너무 질기다고 “사장을 불러와!”고 하면서 언성을 높였다. 이럴 때는 우선 고객을 진정시키는 것이 상책인지라 나는 잠깐만 기다리라 하고 나서 주방의 육부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육부장님, 고객님께서 탕에 들어있는 소고기가 너무 질기다고 하시니 만만한 거로 바꿔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꼬? 만만해? 내가 만만해 보여?”
설렁탕 가마에서 거품을 거둬내고 있던 육부장은 국자를 작업대 위에 탁!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부릅뜬 눈은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부장님, 그, 그게 아니라, 고기가 질기다고 사장님을 찾으시니까 제가 만만한 거로 바꿔 드린다고…”
“아니, 고기가 만만하다고? 고기가 만만해서 씹어 먹는 거야? 한국말을 제대로 배워서 해야지,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말 안 하거든? 하여튼 조선족들은 배운 것이 없어 가지고 지들 맘대로야.”
육부장은 별일도 아닌데 목에 핏줄을 세워가면서 삿대질을 해댔다. 순간, 내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뚜껑이 확 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툴 때가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어서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세 번 되뇌고는
“네, 알겠습니다. 일단 질기지 않은 고기로 부탁드립니다.”
고 차분하게 말했다.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고기는 안전하게 손님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나는 찝찝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고향에서 늘 사용해 왔던 ‘만만한 고기가’ 조선족을 팔아먹을 정도로 틀린 표현이었단 말인가? 나는 자꾸 시계를 쳐다보면서 빨리 점심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브레이크 타임이 다가오자 나는 육부장을 찾아갔다. 주방 식구들은 점심 장사 마무리를 하면서 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미숙이는 주방 육부장을 건드려서 좋은 일이 없다고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며 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부장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틀린 것은 고치고 제대로 배워야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만만하다’ 라는 단어를 부적절하게 사용했다면 고치도록 하지요. 하지만 누가 틀렸는지는 컴퓨터로 검색해보고 여러분들 앞에서 시비를 가려보는 것이 어때요?”
“자, 자, 그럼 아이스크림 내기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좀 전까지 뒤에서 나를 말리던 미숙이가 불쑥 앞으로 나서며 한마디 던지고는 뒤로 날름 물러난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고 했는데… 나는 미숙이를 힐끔 쳐다보고는 어이없어서 쓴웃음을 지었다.
“와~ 더운데 잘됐네요. 아이스크림 내기, 좋아요~”
여기저기서 덩달아 아이스크림 타령이 터져 나왔고 열세 명이나 되는 직원들은 주섬주섬 홀에 몰려와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안 봐도 비디오지. 영락없이 김팀장이 아이스크림 사게 될 거야.”
“미스 박, 빨리 컴퓨터로 검색해 봐~ ‘만만하다’ 그 단어를 검색해서 읽어보란 말이야.”
“네, 제가 검색해서 아예 출력해 드리겠습니다. 내기에는 당근 증거자료가 있어야 하지요?!”
미스 박은 카운터 담당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부모님이 부자여서 마당에 그네가 있는 전원주택에 사는데 대형 냉장고만 네 대라고 한다. 게다가 화장실도 여러 개라서 매일 아침 어디에서 볼일을 볼까 하고 고민하다가 변비에 걸렸다고 한다.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지만, 직원들은 아무도 미스 박이 어디에서 사는지 몰랐다.
그녀는 재빨리 컴퓨터 의자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스마트 폰으로 단어를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겠지만 그 시절에는 스마트 폰 출시 전이라서 인터넷 검색은 컴퓨터로만 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장내가 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 미스 박이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찌리릭 찍찍하면서 문제의 ‘만만하다’ 라는 단어에 대한 국어사전 풀이가 용지에 찍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숨 막힐 것 같은 고요함을 가르고 직원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순간 각자의 표정은 다 달랐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게 피식 웃으며 어이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흔드는 육부장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 주겠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쥔 나를 사이에 두고 한국인 직원들과 중국 동포 직원들이 어느새 반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직원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을 사이에 두고 경기의 시작을 기다리는 선수들과 흡사했다.
“출력했어요, 어느 분이 읽어 드릴까요?”
미스 박은 출력한 A4용지를 쳐들고 마구 흔들어 댔다.
이때 육부장이 귀찮은 듯
“그냥 읽으면 될 것을…”
고 구시렁거린다.
“그럼 제가 읽을 게요~”
어느새 카운터 앞에 다가가 서 있던 미숙이가 미스 박의 손에서 종이를 확 낚아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만만하다: 1. 연하고 보드랍다. 예: 만만한 음식.
2. 부담스럽거나 무서운 것이 없어 쉽게 다루거나 대할 만하다.
예: 우리 식구 중 막냇동생이 제일 만만하다.”
다 읽고 나서 미숙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김팀장이 키가 작다고 만만하게 봤네…”
점점 말끝을 흐리던 미숙이는 습관처럼 혀를 홀랑 내밀더니 육부장을 힐끔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두려운 듯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어머나~ 그럼 설마 육부장님이… 지신 건가요?”
“고뤠? 김팀장 말이 맞다는 말인가?”
직원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 마주 보며 한마디씩 한다. 나는 괜스레 어깨를 펴고 가슴을 쑥 내밀었다.
“그래, 그까짓 거 내가 아이스크림 사지 뭐.”
멍하니 서 있던 육부장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손사래를 쳤다.
“부장님, 내기에서 졌으니 전 직원 아이스크림은 당연히 사야 하시고요,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고 아까 조선족을 다 싸잡아서 뭐라고 하셨다는 거죠. 그 부분이 영 마음에 걸립니다.”
이겼다고 마냥 좋아할 줄로만 알았던 내가 한발 앞으로 쑥 나와서 덩치가 큰 육부장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와중에 나는 문득 우리 두 사람 덩치가 많이 차이 나서 직원들이 마치 ‘고양이와 쥐’ 보는 것 같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안은 또 다시 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 직원들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서로 눈치만 봤다.
“그래, 그래. 내가 미안해요, 조선족을 무시하는 말을 이제는 하지 않을 게요.”
육부장은 좀 전과는 달리 환한 표정으로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갑자기 친한 척을 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는데 김팀장은 전직이 뭐 에요? 어떻게 한국말을 한국 사람보다 더 잘 아는지. 참나,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드네.”
“저는 중국에서 농사짓던 사람입니다.”
“그래요? 정말 대단해요!”
육부장은 엄지를 척 내보이더니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시골에서 자식 농사짓던 사람입니다. 하하하~”
나는 익살스럽게 노래처럼 곡을 부쳐서 대답하고는 육부장이 내민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며 남자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터져 나오는 내 시원한 웃음소리에 서로 눈치만 보던 직원들은 덩달아 식당이 떠나가도록 웃기 시작했다.
“아이고, 김팀장아~ 조마조마했다 아이가. 이렇게 웃으니까 아이스크림 안 먹었는데도 속이 다 시원하다 야.”
삼십 년간 중국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퇴직하고 오매불망 뿌리 찾으러 한국에 나왔지만, 친척들은 못 찾고 식당에서 설거지하는 춘자 이모다. 마지막까지 주방에서 마무리 일 하던 그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무장갑을 낀 채 다가와서 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은근히 걱정했던 것 같은 눈치다.
중국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한국 모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주말 아르바이트 은화도 나에게 다가와서 생글거리며 한마디 한다.
“언니, 너무 멋있어요. 이 참에‘우리말 겨루기’프로그램에 한번 도전해보세요~”
“이야~ 인제 보니 모두 오리지널 한국 사람이네~”
주방장 대전 이모도 얼굴에 화색을 띠고 한마디 곁들인다.
별일 아닌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또 쉽게 치료를 받기도 한다. 아이스크림 먹으며 아무 일 없었던 듯 웃고 떠드는 식당 식구들을 바라보며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로 육부장과 나는 친해졌고 퇴근 후 가끔 포장마차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한낮에는 직원들이 휴식하는 브레이크 타임이 있는데 가끔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아줌마 한 분이 있었다. 그날도 점심시간이 지나서 손님이 거의 빠져나간 한가한 식당에 아줌마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날따라 주문한 설렁탕이 늦게 나오자 심심했던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저 위에서 온 것 맞죠?”
말투가 좀 이상하게 들렸다.
“위에서 오다니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특파원도 아니고 날개 달린 천사는 더욱 아니고 위에서 오다니 무슨…?”
깍두기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던 나는 아줌마를 쳐다보며 약간 퉁명스레 되물었다.
“에이~ 중국에서 온 것 맞잖아요. 어느 곳이에요?”
“중국에서 살다 왔습니다만, 사모님께서는 혹시 중국 지리 잘 아시나요?”
“중국이 워낙 커서 잘 모르지만 그래도 대충은 알지~ 내가 이래 뵈어도 중국 보따리 장사 5년차야! 5년차아~”
아줌마는 손바닥으로 가슴까지 콩콩 쳐가면서 자랑스레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저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왔습니다.”
나는 밥을 먹다가 모래알을 씹은 듯 기분이 언짢았지만, 이 불쾌한 화제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생각으로 얼른 대답했다.
“아, 흑룡강~ 거기는 물이 새까매서 흑룡강이라고 하는가? 쯧쯧… 흑룡강은 먹고 살기 힘든데 인가 봐.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다 거기서 왔대요.”
갑자기 아줌마가 팔짱을 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급기야 혀까지 끌끌 찼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참을 수 없어서 한마디 했다.
“저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 고향이라서 가족이랑 함께 왔을 뿐입니다.”
맞은 편에서 미숙이가 눈을 슴벅이며 더는 말하지 말라고 도리질을 한다. 하지만 이미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나의 눈에 더는 미숙이가 들어오지 않았다.
“사모님은 한국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중국에 보따리 장사를 다니시나 봐요?”
순간, 정곡을 찔린 아줌마가 말문이 막혔는지 신경질적으로 냅킨을 팍팍 여러 장 뽑아냈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냅킨으로 애꿎은 테이블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님, 설렁탕 나왔습니다. 드시다가 혹시 국물이나 깍두기가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나는 주방에서 나온 설렁탕을 테이블에 놓으면서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말했다. 사실 아줌마가 괘씸하기는 했지만 민망해서 더는 설렁탕 먹으러 오지 못할까 봐 그것이 오히려 더 걱정되었다.
그렇게 식당에서 서빙 하던 나는 일 년이 지난 후 면세점에 취직하게 되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세 나라 언어가 가능했고 어렸을 때부터 나름대로 협상의 원칙을 터득하였기에 세일즈라는 직업은 나의 작은 어깨 위에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다. 그렇게 회사에 발을 들여놓고 얼마 안돼서 능력을 인정받은 나는 매장 팀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온지 십여 년, 일만 하느라 나는 가끔 자신이 누구였던지 잊을 때도 있었다. 정체성을 점점 잃어가더니 이젠 한국인 흉내를 너무도 잘 내는 자신이 가끔 소름 돋을 때도 있었다. 나대리가 가끔 매장에 나와서 세 치 혀로 사람을 괴롭히고 차별했지만, 나는 상사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옛날 영화에 나오는 친일파 앞잡이처럼 허리를 굽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나는 매장 팀장 회의가 있어서 본사로 가게 되었다. 회의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화장실에 앉아있다가 본사 최과장과 나대리가 손을 씻으면서 하는 말을 엿듣게 되었다.
“주 52시간으로 단축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나와서 예전처럼 직원들을 연장근무 시킬 수 없게 되었는데 나대리는 어떻게 생각해요?”
“과장님, 오늘 회의 때 공휴일에 휴무를 잡으면 휴일이 믹스되어서 없어진다고 새로운 규칙을 정하는 것은 어떨까요? …”
“나대리,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우리 회사가 자그마한 깡통회사도 아니고… 그리고 사무직이랑 판매직이 차별이 생기는데 그 모순은 어떻게 처리하려고?”
“판매직은 공휴일 날짜만큼 맘대로 휴무를 잡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과장님, 지금 매장이 문제입니다. 새로운 근로기준법 적용으로 근무수당은 올라가고 연장근무 시간은 줄여줘야 하는데, 또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추가 투입해야 하고 매출은 바닥을 치고 있으니…”
입만 열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나대리는 그렇다 치고 평상시 큰 언니같이 인자한 최과장을 은근히 존경하면서 닮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날아온 방향 잃은 탄알에 가슴이 펑! 뚫리고 찬바람이 솨아~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붕~ 붕~
테이블 위에 놓은 나의 핸드폰이 요란스레 몸을 떨었다. 회의할 때는 항상 무음 설정을 해놓는 편인데 화장실에서 충격을 받은 나는 몸은 비록 회의실에 앉아있었지만 정신을 못 차리고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전화 좀 받으세요~ 김팀장! 진동 한번 요란하네…”
옆에 앉은 최과장이 나의 핸드폰을 째려보더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며 짜증 난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안 받을 거면 뒤집어 놓던가, 꺼버리던가…”
최과장이 답답했는지 나의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갑자기 최과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표정을 봐서는 최과장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앞에서는 지금 나대리가 각 매장 팀장들을 설득하느라 공휴일 믹스에 대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하고 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가 말했다.
“나대리님, 과일주스 가는 것도 아니고 휴일을 왜 믹스하는 겁니까? 매장 직원들이 일 년에 대체 공휴일에 몇 번이나 쉴 수 있다고 그걸 믹스해버립니까? 그리고 교대로 근무하다 보니 명절에 쉴 수도 있고 근무하기도 하는 스케줄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건 형평성에 맞지 않아요.”
“그러니까 공휴일에 되도록 근무 하시라니 까요~”
“그렇다고 공휴일에 전 매장직원이 다 출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의문점이 있는데요, 다들 아시지만 우리 회사 사무직은 공휴일에는 물론 대체 공휴일에 전 직원이 휴무입니다. 그런데 판매직원들은 교대근무라서 운이 좋으면 명절이나 공휴일에 가끔 쉴 수 있게 되는데요. 지금 나대리님께서는 그런 공휴일마저 믹스해버린다고 하는데 왜 사무직이랑 판매직이 차별되는 것입니까?”
“거참, 말을 못 알아듣는 군… 우리 회사가 임의로 그러는 게 아니라 나라에서 그리하라는 법이 생겼지 말입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 52시간 근로기준법 실시는 근로자들의 연장근무 시간을 보장해주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공휴일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휴무 날짜가 도대체 왜 믹스되어서 없어집니까?”
우리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최과장의 눈동자는 오가는 탁구공을 지켜보듯이 말하는 상대에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갑자기 최과장이 결단을 내린 듯 책상을 탁! 짚고 일어섰다.
“나대리,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내가 분명 아까 그 얘기는 보류하라고 했잖아요…”
“아니, 최, 최과장님…” 나대리는 억울한 표정으로 최과장을 쳐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믹스는 없던 일로 하고 모두 퇴근들 하세요.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
술렁이던 회의장은 금세 조용해졌고 다들 돌아가고 나대리와 최과장만 남았다.
“최과장님, 아까 화장실에서 말씀하실 때 그러라고 하신 것 같은데요?”
“아까는 그러라고 했지~ 그런데 나대리가 앞에서 말하고 있을 때 김팀장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어.”
“그래서요?”
“우연히 봤는데 글쎄 발신인이 차용화 기자님이더라고…”
“차용화 기자님이라고 하면…”
“TV00에 그 유명한 차용화 기자를 몰라요? 사실 이번 일은 결재를 받은 사안도 아닌데 만약 김팀장이 차용화 기자에게 연락한다고 생각해 봐요. 대표님이 잡혀가고 우리 회사가 난리 난다는 말이야…”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절대 방심해선 안돼요. 작은 고추 맵다고 키 작은 쭝국사람 만만하게 볼 건 아니야.”
빠끔히 열린 회의실 문틈으로 두 사람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회의실에 핸드폰을 두고 나온 나는 핸드폰 가지러 왔다가 또다시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게 되었다. 복도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똑똑 노크하고는 조심스레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직 여기 계셨군요. 최과장님, 나대리님, 제가 핸드폰을 두고 가서…”
“아, 아~ 그래요? 그럼, 얼른 가지고 퇴근해요…우리도 이제 가야지~”
내가 들어서자 두 사람은 흠칫 놀라며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주섬주섬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핸드폰을 찾아 들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이때 마침 전화가 또 걸려왔다.
“아, 네, 네~ 시청에서 출발하셨다고요? 저도 지금 회의 끝나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좀 있다 뵙겠습니다~”
나는 뒤따라 나와서 기웃거리며 훔쳐 듣고 있는 두 사람을 의식하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서 전화를 받았다.
차용화는 내가 지난번 허리디스크 시술 때문에 병원에 잠깐 입원해 있을 때 알게 된 한국인 택시 기사다. 그는 나와 한 병실에서 동병상련하면서 친해졌는데 양 꼬치 식당을 오픈할 예정이었다. 시청역 근처에서 사는 그는 나에게 중국인 정서에 맞게 매장 컨설팅을 부탁했는데, 금요일인 오늘 저녁 대림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입원했을 당시 내가 연락처를 입력할 때 오른팔에 링거를 꽂고 있어서‘차용화 기자님’ 이라고 입력해버렸는데 어영부영 수정을 안 하고 그대로 두다 보니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점 하나 때문에 님이 남 된다” 고 하더니 입력 한번 잘못한 것이 이런 웃기는 결과를 가져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주 52시간 근로기준법 개정안 때문에 꽁무니에 불 달린 짐승처럼 허둥대던 그 일행이 제가 싼 똥에 물러앉은 것을 보니 나는 약간 시원섭섭해 났다. 분명 이긴 것 같은데 이긴 기분은 아니다. 한참 더 싸워야 직성이 풀렸을 텐데 말이다…
회사 건물 밖에 나오니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서쪽 하늘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보일락 말락 숨바꼭질한다.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갑자기 보름달이 걸려있던 대낮같이 밝은 고향집마당이 눈앞에 선하다. 나는 후덥지근한 서울의 공기를 깊이 마셨다가 훅~ 내뱉고 나서 눈을 떴다.
전철역은 늘 그렇듯이 사람들로 붐빈다.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두세 발자국 걷고는 짐을 내려놓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짐을 들고 걷는다. 다리가 많이 불편한지 몸을 좌우로 심하게 흔들며 뒤뚱거린다.
나는 잰 걸음으로 다가가서 “어머님,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고 하면서 짐을 빼앗아 들었다. 행선지를 여쭤보니 나랑은 정 반대 방향이었지만 할머니를 전철 타는 곳까지 모셔드렸다.
“어이구~ 고마워. 어쩜 이리도 친절할까? 색시 고향은 어딘가?”
“부모님 고향은 한국이지만 저는 중국에서 태어난 조선족입니다!”
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돌아서서 갈 길을 재촉했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신나게 걸었다.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는 가수 김건모가 부르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네가 정말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 ”
심사평
응모글 제50편 심사평「좌충우돌 한국 생활」 심사위원 서옥란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좌충우돌”이라는 표현으로 이국타향에서의 생활을 표현하는데 모두 공감할만한 단어인것 같다. 앞서 다른 한 수기에서도 제목에 이 단어를 쓴 기억이 난다. 이 글은 섬세하고 생동한 언어적 표현, 풍부한 문학적 형상화에 ‘재미’까지 더함으로써 수기라기보다 여러 미학요소를 두루 잘 갖춘 단편소설로 보는게 더 적합할 것 같다.
이 글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평하고 싶다.
첫째, 유머와 재미로 넘쳐나며 문학적 형상화가 뛰어난 작품이다. 한국에서 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만한 구인구직과정, 식당에서 서빙하면서 생긴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인한 실수, 한국인과 조선족과의 마찰 등을 실감나게 다루고 있지만 유머적인 표현과 유창한 흐름으로 독자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둘째,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문화적 마찰과 갈등을 아주 적절한 사례로 들어서 엮어 내려감으로써 진실감과 생동감을 더해준다. “활어活鱼회”, 분명히 싱싱한 회라고 우기는 저자와 무슨 회인가고 따지는 손님사이의 에피소드때문에 식당은 웃음바다가 된다. “고기가 만만하다”라는 표현때문에 면박을 맞은 저자는 사장과 따지고 내기를 건다. 하지만 결국 전체 직원이 보는데서 아이스크림 내기에서 이겨버리고 더욱 당당해진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작정 남의 말에 숙어들지 않고 도리를 따지는 주인공의 견강함과 개성이 돋보이는 이야기들이다. 그렇게 해서 “그래, 그래. 내가 미안해요, 조선족을 무시하는 말을 이제는 하지 않을 게요.” 라는 사과까지 받아낸다.
셋째, 언어적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문장의 곳곳에 비유와 상징과 은유적 표현이 숨어 있어서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이미지 형상화에 성공적이다. “입에 지퍼를 꾹 잠그고”,”얼굴에 심술이 주렁주렁 걸려있다”,”“사람들의 조롱이 담긴 웃음소리는 식당 벽에 부딪혔다가 다시 날아와서 나의 뺨을 철썩 때리는 것 같았다.” “순간, 내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뚜껑이 확 열릴 것만 같았다.” 등등 표현들이 문장 곳곳에서 볼수 있는데 언어의 감칠맛과 묘미를 느끼게 하며 수많은 상상력을 이끌어낸다. 문장의 끝머리에 “서쪽 하늘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보일락 말락 숨바꼭질한다.....갑자기 보름달이 걸려있던 대낮같이 밝은 고향집마당이 눈앞에 선하다.”에서 “초승달”과 “보름달”이라는 대조적 표현과 상징을 통해 저자의 현재의 어려움과 그걸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이 ‘고향’과 ‘거기에 있는 사람’들임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 소설의 갈등과 구조적 기법 장치에 능란하다. “주 52시간 근로기준법 개정안”때문에 회사에서 팽팽하게 갈등이 고조되던 시점에 김팀장에게로 한통의 전화가 들어온다. 바로 “차용화 기사”를 “차용화 기자”로 잘 못 입력했던 아는 택시기사의 전화였다. 어처구니 없는 것 같지만 “기사”를 “기자”로 잘 못 안 나대리와 최과장은 나의 주장에 승복하고 만다.
이 글은 그야말로 제목 그대로 “좌충우돌”하는 한국생활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혜와 인내심으로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지키기에 노력한다. 또한 모순과 갈등 속에서도 한국인과의 화합과 화해를 이어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재미와 웃음뒤에 깊은 사색을 던져주는 훌륭한 작품이며, “좌충우돌”하면서 이국생활을 하는 우리 민족 독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안겨주리라 생각된다.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기업 협찬 배너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
【수상소감】박은화
아마추어 육아맘의 감성 글쓰기
꿈에서조차도 상상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였어요.
제가 느끼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기록한 글이 여러분들한테 사랑받고 인정받고 수상을 하다니! 그것도 글을 잘 쓰시는 쟁쟁한 분들 속에서 수상을 하다니 아직도 꿈만 같답니다.
엄마가 되면서 무작정 글로 써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어요. 육아도 아마추어—모든 것이 서툴고 독박 육아로 인해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피로는 무한대로 쌓여가면서 저한테서 여유라고는 좀처럼 찾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분명 지나갈 것이고 또 언젠가는 지금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그 한 가닥의 희망이 저의 삶을 지탱해 주었어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저의 가족들을 위해 기록한다는 역동적인 의지였을지도 몰라요.
이리 시작하여 기록한 글이 많은 분들의 공감을 받고 응원을 받게 되였네요. 이 자리를 빌려 저를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들께 공감할 수 있는 그리고 위로를 드릴 수 있는 글을 발표하는 작가님들을 응원하는 팬으로 살도록 하겠습니다.
【응모글 제52편】피보다 더 끈끈한 정
글: 박은화 랑독:장련 음악편집:변소화
요즘 들어 나는 인간의 정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보게 된다. 아는 사이, 친구 사이, 이웃사이, 형제 사이, 부모 자식 사이, 부부 사이 등 세상의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꼭 서로서로 정을 주고받게 되며 그 정으로 때론 감동으로 눈굽을 적시기도 한다.
나에게는 올해에 82세 되시는 양부모님이 계신다. 타국에서 친부모처럼 같이 지내는 그런 분이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우리 사이의 정은 16년 동안 줄곧 변함이 없었고 세월이 갈수록 깊어만 가고 있다.
우리의 만남은 2년만에 이루어졌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사태 속에서 전 세계가 불안에 떨었고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그간 왕래가 끊겼다.
왜냐하면 내가 둘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산부인과 담당 의사의 재삼 만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県)을 넘나드는 만남은 자제해 주길 바란단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라서 만에 하나 임산부가 코로나에 확진되면 병원에서 지정한 시간에 제왕절개로 출산해야 했고 이는 병원에서 2차 감염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결정이라고 했다. 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였다.
연세가 있으신 만큼 두 분은 해마다 눈에 띄게 기력이 쇠약해지고 있다. 오늘에 충실하고 내일이 없는 삶을 사시는지라 두 분의 말씀처럼 내일이란 장담도 기약도 하기 힘든 일이다. 힘든 걸음을 하신 만큼 효도를 해드리고 싶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밥상머리에 오손도손 모여앉아 같이 밥을 먹고 두 아이의 재롱잔치에 웃음꽃을 피웠다.
첫째 아이는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재롱잔치에 우리는 박자에 맞춰 손뼉을 쳤다. 박수소리에 흥이 난 아이는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차례대로 불렀고 양부모님은 소싯적 불렀던 노래라면서 무척 반가워하셨다. 우리는 노랫소리에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밤늦게까지 노래잔치를 열었다.
돌이 지난 둘째 아이는 처음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인데도 곧잘 따랐다. 할아버지가 코끼리 동요를 재미있게 몇 번 불러주자 둘째 아이는 그 다음날부터 그림책을 갖고 할아버지 무릎에 턱하니 앉는다. 할아버지의 동물 흉내에 둘째 아이는 좋아서 까르륵한다. 두 분도 아이들이 잘 따라줘서 기뻐하셨다.
그러는 양아버지는 남편한테 꼭 한번 데리고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으시단다. 바로 백마 온천(白馬温泉)이란다. 퇴직자에 동료들 사이에서 좋은 곳이라 칭찬이 자자해서 기회가 닿으면 꼭 한번 가보고 싶으셨단다. 양아버지가 가고 싶다면 더 늦기 전에 하루라도 건강하실 때 모시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즐거움도 잠시... 요 며칠 대가족의 살림에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왔다... 처음 며칠은 힘든 줄도 모르고 여러 슈퍼를 다니면서 제철 음식 소재를 구했었다. 두 아이를 돌보면서 저녁밥상을 차려야 했으니 점점 힘이 부쳤다.
이렇게 며칠 동안이라도 식사 준비가 무척이나 힘든데 연로하신 양어머니는 나의 산후조리를 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두 분은 내가 첫 아이를 출산했을 때에 양어머니는 내가 노산이라고 걱정하시면서 우리 집에 직접 오셔서 한 달 내내 삼시 세끼에 가무를 도맡아 주셨고 양아버지는 나의 말벗이 되어주셨다. 산후조리가 따로 없는 나라에서 나는 두 분의 덕분에 이국 타향에서도 편히 산후조리를 하게 되였다. 나와 남편은 초보 엄마, 아빠라서 모든 게 생소하고 서툴렀지만 두 분이 곁에 계셔주신 덕분에 신생아를 마음 편히 돌볼 수 있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산후조리를 해주신다 하셨던 두 분, 고국에 계시는 나의 부모님을 대신해 주셨다.
식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밥상에 숟가락을 하나 더 놓으면 되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닌데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벌써 지쳐 헐레벌떡하는 나 자신이 미웠다.
이런 두분과의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16년전, 내가 교환 유학으로 일본에 와, 그 댁에서홈스테이를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정년퇴직을 하신 양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양어머니는 홈스테이 자원봉사자들이시다. 두 분은 실생활에서 현지 가정의 문화를 체험하도록 도움을 제공하시는 분들이다.
두 분의 집을 방문하면 주방 쪽에서 양어머니께서 "어서 와" 하면서 마중을 나오신다. "배고프지? 어서 손 씻고 밥 먹자"라면서 나를 꼭 안아주시고 나의 등을 어루만져 주셨다.
내가 밥상에 앉으면 바로 김이 모락모락나는 국반찬을 가져다 주셨다. 음식 솜씨가 좋으신 양어머니의 밥상은 늘 제철음식으로 한상 가득 차려져있었다. 봄이면 봄나물 튀김, 여름이면 시원하게 소면을 말아먹고, 가을이면 가을 야채들로 카레밥, 겨울이면 방어 무졸임등도 밥상에 올랐다. 갖가지 일본의 가정 음식을 맛보게 해주셨다.
양어머니는 자취를 하는 내가 혹시라도 배를 곯지는 않았는지 영양실조라도 걸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셨고 나의 앞 접시가 비기도 전에 반찬을 잔뜩이나 떠주셨다.
그리고 양아버지는 "후식 먹는 배는 따로 있지" 하시면서 냉장고에서 후식을 꺼내오셨다. 매번 후식은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로 해주셨다.
두 분의 푸짐한 마음을 받고 나도 두 분한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셋이서 밥상에 둘러앉아 주간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이랑 놀러 다녀온 얘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에서 있은 일 등 나의 일상을 나누었다.
여느 가족과 다름없는 소소한 일상의 대화였지만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고 모든 것이 생소한 이국 타향에서 내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생긴 기분이어서 더 좋았다. 그래서 나는 셋이 밥상에 둘러앉은 식사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두 분은 모든 게 생소한 환경 속에서 내가 일본의 문화와 풍습 등을 가장 직접적이고 빠르게 배울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
양어머니는 밥상에 앉아 국을 마시는 밥상 문화부터 가르쳐 주셨다. 숟가락으로 밥상에 놓여있는 국그릇에서 국을 떠먹는 우리의 문화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국그릇을 입 가까이에 가져가 젓가락으로 국을 마셨다. 밥을 먹고 나면 가무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양어머니만의 설거지하는 방법, 주방 청소 꿀팁도 전수해 주셨다.
양아버지는 일본어를 가르쳐 주셨다. 내가 유학 간 곳은 오사카라서 특유의 사투리가 진한 곳이었다. 나름 일본어 기초가 있다고 자부했던 나 자신이었지만 실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일본어는 내가 교과서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 했던 말들이 많아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때마다 양아버지는 내 표정을 읽고 내가 알아듣고 납득이 갈 때까지 내심 하게 설명해 주셨다.
지금에 와서 나의 유학시절을 돌이켜 보면 일본이라는 낯선 사회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시간보다도 두 분한테서 "사랑"을 받은 시간이 더 많았다.
이런 두 분의 사랑에 나는 나의 방식대로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양어머니 생신날이면 아르바이트로 다니던 유명한 호텔 레스토랑에 식사를 초대했다. 양어머니는 삼시 세끼 가족들 밥상을 차리는 주부한테는 외식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고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양아버지 생신날이면 수산시장에 가서 양아버지가 즐겨드시는 자연산 도미와 털게를 사갖고 두 분의 댁을 방문했다. 양아버지는 여자애가 무슨 힘으로 그 무거운 수산물 포장박스를 들고 어떻게 전차를 갈아타고 왔느냐며 놀라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내가 시집가던 날, 두 분은 날 낳아주신 친부모님들보다 더 많이 우셨다. 기뻐서 흘린 눈물이었는지 쓸쓸해서 흘린 눈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같이 많이 울었었다. 푸하하, 크 헤헤~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과거, 현재, 미래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였다. 힘들면 언제든지 두 분이 계신 집에 돌아오라시던 두 분의 그 말 한마디, 그 말 한마디는 이국 타향살이에 얼마나 큰 힘이 되였는지 모른다. 그러는 양아버지는 늘 나의 든든한 뒤빽이 되어주셨다.
가족이 뭐 별거던가... 설 명절에 모여서 밥을 같이 먹고 그리 소원이셨다는 유람 명승지에 다녀오고 부모님한테 자식이 음식 솜씨도 부려보고... 이런 가족이 또 어디 있던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피보다 더 끈끈한 무언가가 있다. 그게 바로 정이다.
비록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지만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미 가족으로 되어있었다. 16년이란 세월을 같이 하고 가족으로 의리를 지켜왔고 지금도 가족으로서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써가고 있다.
나는 언제나 양부모님한테 친딸처럼 최선을 다해 효도를 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요 며칠 양부모님이 집으로 돌아가신 후로 두 분의 빈자리는 상상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져서 썰렁하기만 하다. 콧구멍만 했던 집이 자꾸자꾸 휑하게 느껴진다.
만남은 어디서나 누구나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만남을 끝까지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소중한 인연일지라도 내가 대하기 나름이고 가꾸어 가기 나름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연을 이어왔듯이 힘이 닿는 한 계속 서로에게 좋은 인연으로 남고 싶다.
이렇게 나는 16년 동안 양부모와 주고받는 사랑에서 인간의 삶에서 정이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서로 베푸는 것으로 쌓은 정은 해가 가고 세월이 흐른다 할지라도 색 바래지 않고 끈끈히 이어질 것이다.
심사평
응모글 제52편 심사평「피보다 더 끈끈한 정」 심사위원 김학송 시인 국가1급작가
박은화의 응모글 “피보다 끈끈한 정”은 인간의 정을 생동하게 그려낸 재미나는 글이다.
유학시절 일본에서 만난 양부모와의 특별한 인연과 정분이 독자의 가슴에 봄해살처럼따사롭게 스며들어 좋다.
작자는 양부모와 얽힌 사연을 소상하게 그려내면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피보다 더 끈끈한 무언가가 있다. 그게 바로 정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이 뚝뚝 흐르는 풋풋한 이야기여서 독자들은 그 말의 진실에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문맥이 순탄하고 필치도 무척 정서적인것으로 보아 작자가 풍부한 감수력과 인생에 대한 섬세한 표현력을 갖춘 녀성임을 알수 있다.
작품의 구성과 표현력이 안정감을 주고 부드럽고 명쾌한 필치가 즐거움을 주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더구나 반갑다.
타국에서의 이색체험을 통해 인간의 정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던져주는 글이다.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기업 협찬 배너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
【수상소감】최화숙감동과 감사한 마음 담아
빠알간 노을이 곱게 내려앉은 단풍잎들을 따뜻이 감싸주는 늦은 오후, 빛처럼 수상 소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았습니다. “어이구 우리 숙이 참으로 장하구나…”라고 “아부이”가 저 노을 속에서 인자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신체 적으로 건장한 남자가 최씨 집안의 장손인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백년가약을 굳게 지키고 동짓달 설한풍에 떨고 있는 저를 선뜻 품에 안고 당신의 호적에 올려 주신 우리 “아부이” 이 거룩한 분은 그야말로 아버지이자 저에게 생명선을 연장해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아부이야 ㅡ아버지에게 드리는 글>을 이번 <세계조선족 글짓기대회>라는 큰 무대에 보내게 된 계기는 바로 저가 중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한국에 오기로 결정이 난 후였습니다. 이제 국경을 넘어가면 저를 키워 주신 엄마 아버지의 령혼을 고향에 그냥 두고 간다는 마음이 한없이 슬펐습니다. 무엇이든 부모님께 마지막 효도라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마침 할빈에서 남대문 떡집을 하고 있는 고향 친구 허경희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자기 차로 고향에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수 십년전에 수력발전소가 들어오면서 모두가 이민을 하고 마을은 큰 저수지 물속에 종적을 감추은지 오래 되였습니다. 친구 덕분에 엄마의 기일도 령혼도 어디에 뿌려졌는지조차 모르는 불효한 마음을 담아 마을 앞 양지바른 쪽에 엄마에게 아버지 령혼도 모셔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을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을 담아 차려드렸습니다. 이제 두 분이 고향산에서 함께 살아 갈 수 있게끔 모셨다는 의미에서 조금이나마 속죄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날 밤 이 풍진 세상 돌풍에 휘청일때마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나누었던 글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부쳐드리고 떠나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저의 전생의 비밀과 현제 저의 삶이 공존하는 글이라 많이 주저하게 되였습니다. 고심 끝에 십여년전 삶의 뒤한길에서 질척이는 제가 글쓰기를 간신히 잡고 있다는 걸 알아본 한 고마운 분이 “선생님, 남들 다 앞으로 정진하는데 선생님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언제 앞으로 나가겠어요. 제가 편집해 줄 테니 글을 써서 보내세요” 라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따뜻한 마음을 전해왔습니다. 지금도 못하지만 그때는 컴퓨터를 아예 예외인 저가 핸드폰으로 대충 써 보내면 곱게 편집해서 여러 그룹에 올려 주었습니다. 그 분을 떠올리며 이번 <(카라즈컵) 세계조선족글짓기> 대회란 큰 무대에 감히 저의 생의 비밀을 세상에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늦은 밤 글을 보내고나서 베란다 창가에 서서 밤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미소가 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반짝이고 계셨습니다.
저의 글이 편집선생님들의 고운 손을 거쳐 음악배경까지 넣어서 고운 목소리로 랑송을 해주신 덕분에 세상에 태어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사랑을 담아 댓글과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또한 저의 글을 알게 모르게 많이 돌려주시는 눈물겹도록 감사한 분들도 계셨습니다. 여러분의 덕분에 저의 글에 278개라는 댓글로 최고의 기록을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글에 아낌없는 칭찬과 따끔한 조언으로 심사를 해 주신 이동렬 대표님께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고, 저의 글을 보시고 너무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조차 없었던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마음의 문을 닫고 성장의 아픔을 겪었던 나의 과거를 수호신인 아버지와 끝없는 대화로 이 넓고 복잡한 세상을 헤쳐가며 글짓기를 숨통처럼 잡고 외 가지에서 뻗어가는 내 유전들의 튼실한 뿌리가 되려고 모지름을 쓰는 저의 현모습이 아마도 이번 글짓기 심사위원님들의 애정을 불러오게 되여 심사점수 271점이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상은 정말 혼자가 아닌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감동의 순간이였습니다.
저의 글 <아버이야ㅡ아버지에게 드리는 글>이 이번 글짓기 대회에서 심사점수가 가장 높고 댓글도 가장 많았다는 것이 정말 감동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 저를 가슴으로 키워주신 부모님, 또 이렇게 저의 가파른 인생길에 힘찬 응원을 아끼지 않는 고마운 사람들이 함께였기에 저의 이번 응모글이 댓글과 심사점수 모두 1위의 높은 점수로 세상과 마주하게 되였다고 봅니다.
이번 글짓기는 분명히 <조글로>와 <쉼터>에 댓글과 클릭 수 점수가 40점 본다고 했는데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불찰로 그 많은 댓글을 써준 고마운 분들과 저의 글에 높은 점수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클릭 수를 놓힌 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사람 마음은 어쩌는 수 없이 사적인 감정에 몰입되나 봅니다. 이런 마음 가져서 죄송합니다.
끝으로 이번 글짓기를 위해 애쓰신 주최측과 각 매체 편집님들과 많은 댓글과 응원 메시지를 알뜰히 써주신 모든 분들과 음악과 고운 랑송으로 감동을 더 한층 울려 주신 선생님들 그리고 심사위원님들께 허리굽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세계조선족글짓기>를 통해 저의 마음에 담고 있던 무거운 짐을 감히 세상에 내려놓게 되어 정말 감사하다는 말과 아직도 저와 같이 똑 같은 운명을 지닌 고아나 입양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저처럼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과감하게 세상에 마주서기 바란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세상은 정말 혼자가 아닌 따뜻한 사람들이 서로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축복의 장이란 걸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앞으로 더 많은 열정과 노력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조곤조곤 잘 가꾸어 가렵니다.
저의 <아부이야-아버지에게 드리는 글>에 애정을 담아주신 모든 분들 고맙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 서울에서 최화숙 드림 )
【응모글 제28편】아부이야 – 아버지에게 드리는 글
글: 최화숙 랑독:장련 음악편집:변소화
아버지. 아버지가 어린 내 손을 잡고 거닐던 이 거리를 나는 내 키를 훨신 초월한 막내딸의 손을 잡고 걷고 있습니다. 자식이 무엇인지요. 남의 가정집 일을 두 집이나 다니는 저에게 간만에 주어진 황금같은 일요일. 몸이 천근 같지만 지속되는 코로나로 날개 부러진 새처럼 방콕에 지쳐있는 딸이 안스러워 방역해체가 되기 바쁘게 데리고 나왔습니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나는 아버지의 체취를 온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딸의 손을 잡고 밀착한 몸과 몸의 전율을 감촉 할 때면 행복 바이러스가 샘물처럼 솟아납니다. 이 묘한 감정이 바로 주어도 주어도 더 주고싶은 부모사랑이겠지요. 제가 딸을 바라만 보아도 마음의 잔잔한 여울소리가 들리듯이 아버지도 저에게 태산같은 부성을 몰부으셨겠지요. 차편이 어려운 시골에서도 여름 방학이면 나를 데리고 할빈에 와서 이 중앙대가돌길을 자박자박 밟으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길거리 음식도 먹고, 송화강에서 배를 타고 태양도에도 가고, 이곳의 구석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메아리로 들려옵니다.
아버지는 코로나라는 단어가 생소하시지요?
그 악성 바이러스는 전파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혹시라도 감염의 의구심땜에 사람들 사이에 실낱같은 거리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버스를 타도 어디를 가도 건강코드를 스킨해서 바치고 일상생활이 여러모로 참 어렵고 불편합니다. 아버지. 겁이 유별나게 많은 나는 꽉 막힌 버스를 타기보다 차라리 걸어다니는 게 마음이 더 편합니다. 삼각형을 그리기라도 하듯 우리 집에서 사장님네 집으로, 사장님네 집에서 또 다른 사장님 집으로 걸어 다니면서 계절따라 변해가는 가로수와 호흡도 나누고, 오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경소리에 귀도 기울이고, 아버지와 대화도 주고 받고, 교통비도 축적하고. 이것이야말로 일거량덕이 아니겠습니까? 난 요즘에 부쩍 내게 이 튼실한 두다리를 주신 아버지가 눈물나게 고맙습니다.
내가 여섯 살 때였지요. 아침에 일어서던 내가 썩은 나무 몽뎅이처럼 한쪽에 픽 하고 꼬꾸러지니 아버지는 바로 담요에 나를 싸서 안고 앞집 침쟁이 집으로 달려갔지요. “아이구 숙아, 안된다. 숙아, 니는 이러면 안되구 말고. 니는 꼭 혼자 걸을수 있어야 된다. 알겠나 숙아. 으흐흐…” 아버지 눈이 화등잔처럼 커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대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수 없었지요. 그냥 귀에는 윙윙하는 바람소리와 “에~으 에~으” 하는 어미양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였죠. 침을 아무리 찔러도 나는 아무 감각도 모르고 바지에 오줌만 실실 쌌던거죠. 정성이면 감천이라고 매일 침을 맞히고 아버지가 밤 낮 다리를 주물러줘서 며칠만에 내가 벽을 짚고 갓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비칠비칠 걷기 시작했지요.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고 말고요. 그때 아버지가 바로 손을 쓰지 않았다면 이 웅진 세상에 앉은뱅이가 되여 어찌 살았겠습니까?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게 어디 이 두 다리 뿐이겠습니까?
나도 이젠 외할머니가 되였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 외길 인생에서 내 가지들이 이리 저리 뻗어가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아니였으면 나는 습관성 유산으로 평생 애도 못 낳았을 겁니다. 임신하면 두달을 못 넘기고 피떵이를 쏟아버리는 나를 데리고 아버지는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 다녔지요. 아버지가 약이라고 양똥같은 걸 하루도 빼지 않고 4달이나 먹이던거 말입니다. 내가 엄마가 되고나서야 알았는데 그게 바로 다른 사람이 유산한 피떵이였다면서요. 여자들도 비려서 하기 힘든 피떵이를 뜨거운 물에 주물러 얼거미에 걸러서 솥에 말리워 환을 만드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체면이 유별나게 많은 아버지가 자존심 깔고 산부인과를 찾아 다니며 그 구하기 힘든 걸 4개나 구해서 먹였으니 말입니다.
아버지. 나 지금도 세월을 거슬러 보면 말똥머리 여섯 살 때가 제일 환상적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머니가 노란 기름이 동동 떠있는 양젓을 훌훌 불어서 먹이고, 낮에는 엄마랑 죄기도 만들고, 헌 옷으로 인형도 만들어 애기 놀이도 하고, 아버지 다리위에서 눈을 맞추며 “우리 숙이 쓩 올라간다. 윙~ 윙, 우리 숙이 비행기 타고 아버지랑 달 나라 별 나라 구경 간다” 하며는 세상이 다 내 것인 것처럼 방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깔깔댔지요.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아버지가 내 다리를 주무르며 구수하게 들려주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얘기를 듣다가 사르륵 잠이 들 때 말입니다. 내가 백설공주가 되어 어머니 아버지 손을 잡고 동화속의 아름다운 세상을 돌고 있는거예요. 그 유리알 같던 행복이 외가집에 가면서 산산조각이 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작은 내 가슴으로 감당하기 너무 아팠던 그 해 봄. 우리 조무래기들이 참새처럼 재잘대며 강뚝에서 쑥을 캐고 있을 때 였지요. 한창 가레질을 하던 아줌마가 갑짜기 뛰여와 내 손을 덥썩 잡더니 “아이고 니 경순이 딸 맞지. 금방 주어 왔을 때는 온 몸이 재투성이 천지라 마치 쥐새끼 같았다. 구경 온 사람들이 살지도 못한다고 변소에다 내다 버리라고 야단법석이였지. 남들이야 뭐라고 하던 경순이하고 태진이가 아를 꼭 안고 울어샀더니만. 아이고 저 쌍고풀에 판들거리는 눈알 좀 봐라. 보조게도 쏙 드가는게 제법 이쁘다. 경순이가 아를 못나서 그렇지 학교때부터 야무지기로 경순이 따라갈 사람 없고 말고. 가시나 니는 복 받은거다. 니 엄마 아버지 못 만났으면 벌써 까마귀 밥이 됬을거다. 장차 커거들랑 엄마 아버지께 잘 하거라…” 눈꿉까지 찍으며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손에 쥐여주는 그 아줌마가 갑짜기 마귀로 보이며 하늘이 핑 돌고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눈을 뜰수 없었지요. 내가 깨여났을 때는 외가집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누운채 이마에는 수건이 얹어져 있더군요. “와이구 이것아 이제야 살아났구나, 니가 없으면 니 엄마 어찌 살겠나. 내가 그 여자 가만두면 성을 간다. 니 엄마랑 어려서부터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더니 어디 애한데 할 말이 따로 있지 으흐흑…”하며 나를 꼭 껴 안고 넑두리를 하는 것이였지요. 소나기를 두드려 맞은 병아리처럼 너부러져 있던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외할머니를 확 뿌리치고 나 친엄마 찾아 간다고 맨발로 막 뛰쳐나가 마당에 엎어져 악을 쓰고 울었지요. 핏줄이 뭐 자식이라고 그 어린 게 무슨 친 엄마를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듬해 내가 외할머니를 따라 우리 집이라고 왔을 때는 중국사람들이 위, 아래에서 살고 우리 사람들이 중간에서 사는 긴 동네였죠. 그때 내게는 낯선 동네보다 어머니 아버지를 보는 게 더 낯이 설었습니다. 그렇게 보고싶던 어머니 아버지를 보고도 외할머니 치마자락만 잡고 소 눈알 굴리듯 눈만 멀뚱했지요. 내게 매일 젖을 짜주던 어미 양도, 지 젖을 빼앗아 먹는다고 심통이 나서 나만 보면 총알같이 날아와 뜨박던 새끼양도, 내가 쓰던 파란색 토끼 모자도, 매일 업고 놀던 소캐뭉치 인형도, 보고싶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내가 입학하던 날 어머니는 밤새 지은 해군복 치마저고리에 장미꽃 무늬가 돋힌 천으로 리봉까지 한뜸 한뜸 달아 책가방을 곱게 만드셨지요. 새 옷에 새 책가방을 메고 어머니 아버지 손을 잡고 학교로 가는 길이 나는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어요. 시골 학교에서 도시애들처럼 눈에 띄게 차려입은 것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학교 선생이다 보니 처녀선생도 친구들도 나를 살갑게 맞아주었지요. 나를 빙 둘러 싼 눈들을 피해 나는 자꾸 가재처럼 슬슬 뒷걸음만 쳤지요. 노는 시간에도 친구들이 폴작폴짝 줄뛰기를 뛰고 죄기를 차고 웃고 떠들어도 나랑은 아무 상관 없듯이 대문에 붙어서 꼼짝도 않고 땅만 보고 있었지요. 학교 운동회 날 사람찾기 달리기에서 종이 쪽지를 들고 쭈물대는 나를 보고 안달이 난 어머니가 쫓아와 “숙아 누군데 빨리 소리쳐라 꼴등하겠다. 그 쪽지 한번 펴바라” 하는 재촉에 나는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최~선~생~”하고 기어드는 소리로 되뇌였지요. 그 못난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한번은 내가 난로불을 쬘라고 친구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다가 똘랑쟁이 문호한데 탁 밀리어 한쪽에 자빠졌지요. 마침 지나가던 아버지가 보고 갑짜기 문을 차고 들어오더니 문호를 획 밀치며 “이놈이 어디서 못되게 굴고 있어? 너만 귀한 자식인 줄 알어. 버르장머리 없이 아무나 때리고 밀치고 여기가 너거 집이가. 한번만 우리 숙이한데 함부로 했다간 내게 혼날 줄 알아라. 자식이…”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지요. 그때 아버지 두 눈에 이슬이 맺히는 걸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늘 친구들 무리에 못 휩쓸리는 내가 얼마나 속이 아팠으면 선생의 체신도 잊으시고 부성의 위력을 보였겠나 말입니다.
천진난만해야 했던 내 동심도 내가 닫아버린 철조망에서 시들어 가고 말았죠. 현기증이 자주 오고 속은 자꾸 뭐가 먹고 싶은 갈증을 호소하고 바로 흙이였죠. 어머니가 바닥에 물을 뿌렸다하면 흙이 먹고파서 환장이 났지요. 나는 어머니에게 한대 얻어맞을 망정 손가락에 후벼판 흙은 입에 넣고 씹어야 직성이 풀렸지요. 날이 갈수록 어지럼증이 자주 오고 몇번이나 까무러 치기도 했지요. 이런 내게 어머니 아버지는 방학마다 나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면서 내 기분도 돋구고 시야도 넓혀주려고 애도 참 많이 썼지요. 거부기 피가 원기에 좋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할빈 송화강에서 80살이 넘는 거부기를 사서 생피를 먹이기도 했지요. 해마다 집에서 병아리를 키워 주먹만 하면 밭에 심어놓은 황기 당삼에 찹쌀까지 넣고 곰닭을 질리도록 해 먹이기도 했지요.
심한 정서불안을 앓고 있는 내게 어머니 아버지는 약을 먹일 수 밖에 없었죠. 그 어린것에 신경 안정제를 먹일 때 마다 어머이는 “이 가시나 니가 어쩌자고 이렇게도 어미속을 썩이는지 모르겠다. 니가 뭐가 부족해서 이르고 있나 말이다. 어이구 내 팔자야…”하며 땅이 꺼지게 넋두리를 하기도 했지요. 수면제를 먹고 의식이 몽롱해지면 언제나 캄캄한 어둠속에서 혼자 오돌오돌 떨고 있는 내가 보였어요. 늘 불안하고 두려움 속에서 자라니 간도 콩알만 해 바스락 소리에도 놀라 자빠지군 했지요. 이런 내게 아버지는 늘 수호신이였죠. 내가 밤에 변소에 가면 내가 볼일을 다 볼 때 까지 아버지는 전지를 비쳐들고 “으..흠.으..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나를 지켜주었지요.
베들베들 말라가던 동심에도 사춘기는 오던 가봐요. 처음 생리가 오던 날 아버지는 나에게 “아이고 우리 숙이 언제 이래 컸는지. 그러고 보니 우리 숙이가 이젠 어린애가 아니구만. 이젠 제법 처녀티가 나는데 ㅎㅎ…”하며 내 등을 토닥이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남자로 보여 소름이 쫙 돋아 어망결에 아버지를 확 밀어버리고 말았지요. “숙아 니 왜 이러는데. 아버지가 뭐 잘못한게 있나, 왜 우리 숙이가 이렇게 화가 동했는지 말이다.” 하는 아버지를 바로 보기조차 부담스러웠지요. 그 날 부터 어머니가 없는 날이면 뭔가 딱히 모를 위엄같은 게 조여와 잠도 바로 잘 수 없었지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말입니다. 그 때는 사회질서가 왜 그리도 물란했던지요. 불량배들이 수시로 여자 숙사에 침범하는 바람에 두려운 나머지 나는 다른 친구들 발치에 옹송거리고도 잠을 잘 수 없었지요. 머리에는 공부가 들어가기는 말짱 도루묵이고 날이 갈수록 공황장애만 커져 갔지요. 한번은 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왔다가 내가 얼굴에 피기도 없이 마른 버짐만 하얗게 번져있고 눈도 퀭해 있는 걸 보더니 당장에 짐을 싸서 집으로 가자고 했지요. 그날 아버지는 식당에 들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돼지곱창 볶음이랑 당면을 시켜주고 아버지 술 안주 1호인 건두부 볶음도 주문해서 술 한 잔 쭉 들이키며 “숙아 니는 아직 어리니 집에서 휴양 잘 하고 다시 학교 다니면 된다. 좋은 대학은 못가더라도 공부 좀 더해서 아버지 선생직을 물려 받으면 되니 걱정마라. 니가 철밥통만 있으면 앞으로 먹고 사는데는 지장 없다. 으흠.. 앗체…” 하며 아버지는 줄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지요. 속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제채기부터 하는 우리 아버지를 나도 어쩜 심통히도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령혼이 말라버린 내 신경이 완전히 낫는다는 건 어디 신이 아이고야 불가능 하였지요.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이런 나를 먼저 동네 중국 학교에 붙혀놓고 하루 빨리 내가 정상이 되면 조선족 학교에 보내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지요. 하지만 그것은 한낮 꿈에 불과할뿐 철밥통을 이어 받기에는 가망이 없다는 것이 불보듯 뻔하자 어머니 아버지는 내게 평생 밥 먹고 살 수 있는 손재간을 갖춰주려고 안달이였지요. 어머니가 하던 싹 바느질은 너무 고생스럽다고 어느날 어머니는 파마를 배우러 집을 나섰지요.
워낙 손끝이 야무진 어머니는 파마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서 부터 손님들이 줄을 서서 몸을 바쁘게 움직여야 했지요. 일이 힘든 것보다 내가 입도 뻥긋 안하는게 어머니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했지 싶습니다. 작은 체구에 바싹 야위어진 어머니가 밤에 새우등을 하고 신음소리를 내도 나는 한번도 어머니 이불에 파고 들어 본 적 없었으니 얼마나 못된 딸이였겠어요. 어머니가 버티는데는 한계가 있더군요. 내가 어림잡아 혼자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말 수 있는걸 지켜보던 어머니는 위경련을 자주 일어키더니 12지장 암으로 결국 한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떠나면서도 이 딸이 어머니 임종을 보고 놀랄까봐 멀리 친척집에 보내고 내가 눈에 밟혀 눈도 못 감은채 두줄기 눈물만 남기고 운명을 하고 말았지요. 불쌍하기도 불쌍하지요 우리 어머니요.
엄마가 떠나고서야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뼈아프게 느끼며 아버지에게 서서히 다가서기 시작했지요. 작은 도시에서 아버지는 영화관 주임이였고 엄마는 백화점 수납원이라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 국가 철밥통을 가진 부부였지요. 내가 4살 때 말을 제법하자 입양 사실을 알고 상처라도 받을가봐 중국지식청년을 따라 쥐도새도 모르게 야밤도주해서 먼 산동네로 이사를 왔지요. 내가 학교에 다닐 나이도 되였고 마을도 중국동네라 조선족 학교가 없는 것도 있지만 행여라도 그 지식청년이 소문을 낼 가봐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외가집에 보내고 조선족 마을을 찾아 다녔지요. 아버지는 마침 선생자리가 나져서 직장을 복귀했는데 어머니는 그만 직장을 잃고 말았지요.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키우느라 모든 걸 다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가 8살 때였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집에다 두고 나만 데리고 고향을 찾아가셨지요. 그날 아버지는 할아버지 령전에 무릅 꿇고 “아이고 아버지 내가 죄인이 옵니다. 최씨가문의 장손이 대를 끊었으니 우리 아버지 저승 가서 어찌 조상들 앞에 나서겠습니니까? 그런데 아버지 나 경순이 아니면 못 삽니다. 아버지 이제 그만 화 푸시고 경순이 맞 며느리로 받아주세요. 그리고 우리 숙이 아버지 큰 손녀 한번 보세요. 얼마나 귀엽고 이쁜지 모릅니다. 흐..흐..윽…” 하시며 나를 당겨 할아버지 앞에 절을 올리게 하고는 황소처럼 엉엉 울으셨지요.
봉건이 많은 세월에 최씨집의 장손이 복막염을 앓고 애도 못낳는 처녀를 맞 며느리로 삼는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일이였지요. 아버지는 불효를 저지를 만큼 어머니를 억수로 사랑했는가 봅니다. 나는 어려서 부터 아버지가 만취가 되여 들어와도 어머니는 남정네들 옷이고 신이고 여자들 발에 차이면 안된다면서 마구 던지는 걸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 늦은 시간에도 술 취한 아버지를 위해 어머이는 꼭 김치밥국을 끓여 올리군 했지요. 나는 자는 척 하다가도 김치밥국이 상에 오르기 바쁘게 팔딱 일어나 한그릇 뚝딱 굽내군 했지요. 떡국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우리 빨래줄에는 늘 어머니가 손수 떡방아를 콩콩 찌어 채로 곱게 쳐서 만든 떡국이 주렁주렁 드리워져 있었지요.
어머니가 김치를 송송 썰어넣고 끓이다 팍팍 으깬 반짜개 쌀을 넣고 떡꾹 한줌 동동 띄워 끓인 김치밥국에는 아마도 자식을 못 낳는 한 여인의 서러움과 아버지에게 죄스런 마음과 나로 인한 처절함이 한데 어우러져 맛도 별미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나는 세상살이 지치거나 힘들 때마다 어머니표 김치밥국을 끓여 먹으면 3년 묵은 채기가 쑥 내려가기라도 한것처럼 시원합니다.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근면하던 우리 아버지. 집에 오는 사람들을 맨입으로 보낸 적 없었던 게 우리 집 가품이였죠. 중국사람들도 최선생이라 하면 호인라고 엄지를 척 내밀었지요.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사람 없다지만 아버지는 술에 아픔을 담고 멀리 두고 온 부모 형제 일가친척들 그리운 정을 주변사람들에게 배풀었던 것이지요. 한없이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했던 우리 아버지. 한번은 저녁에 앞집 총각이 놀러와 TV를 보고 있는데 내가 주방에서 발을 씻고 아무 생각없이 집안에 들어섰다가 그 총각이 가고나서 아버지한데 억수로 혼빵을 먹었던 적도 있었지요. 여자가 남정네들 있는데서 물소리를 내고 바지가랭이를 둥둥 걷고 대수롭지 않게 다니는게 당키나 하냐고 불같은 호통을 쳤댔지요.
내가 한국에서 돌아와 할빈이란 도시에 미용실을 오픈하던 날 아버지는 “우리 숙이 애들 데리고 다른거 하기보다 그래도 손에 익은 솜씨라서 밥은 먹고 살거다. ㅎㅎ…”하며 그렇게 좋아하셨지요. 아버지 생일 날 내가 준비해간 토종닭에 미역국을 끓이고 색다른 음식들로 상을 차렸더니 아버지는 “어이구 우리 숙이 참말로 장하네. 지 엄마 닮아 음식도 제법 잘하는데. 이젠 정말 우리 숙이 어디에 내 놓아도 걱정없겠다. 으흠…”하며 흡족해하던 아버지. 그것이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차려드린 생일상 일 줄이요. 새 엄마로부터 아버지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병석에 누워 코를 골고 있는 아버지가 푹 자고 나면 깨여나겠지 라는 생각밖에 못했습니다. 4월의 을씨년한 저녁 갑자기 아버지 몸이 사시나무 떨듯하며 두 눈을 크게 부릅떳다가 조용히 감으셨지요. 의사 선생님이 사망이라는 말에 나는 생 사람을 빼앗긴다는 기분이 어떤건지 뼈저리게 느끼였어요. 어쩌면 나랑 한마디 말도 안하고 아버지가 다시 못 올 그 곳으로 떠났다는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전날 저녁에만 해도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와 “숙아 오늘 파마손님은 몇이나 있었냐, 우리 숙이 애들 거두며 혼자 많이 힘들지. 어이구… 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고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속옷에서 겉옷까지 어느 것 하나 숙이 니가 사주지 않은 게 없구나. 내가 지금 등을 긁고 있는 이 효자손 까지도 말이다. 니가 지난번 보낸 금반지는 너무 커서 손에 걸리작 거리기도 하고 아버지가 팔아서 약 써버렸다. 아버지는 숙이 니를 키워서 늘그막에 덕 많이 본다. 친 자식 열 보다 우리 숙이 니가 낫고 말고. 오늘은 우리 숙이가 많이 보고 싶다. 어릴 때부터 숙이 니는 미운 구석이라곤 없었지. 이쁘고 귀엽고 인정스럽고 으~흐..음...”하며 울먹이던 아버지에게 나는 천하 몹쓸 짓을 했지요. “아~ 아버지는 왜 이러십니까? 이제 금방 개업했는데 어떻게 가겠습니까? 보고 싶더라도 좀 참으셔야지요. 아버지 지난번에 닭고기가 맛있다 하셨지요. 이제 며칠만 있으면 5.1절이라 학교에서 쉬면 내 토종닭 사서 애들한데 보내겠습니다. 나도 그만 힘들어 쉴렵니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내가 미워 가슴 쥐여 뜯으며 한없이 울었지요.
이별이 영원할 줄 알았더라면 밤새도록 아버지랑 전화를 했을텐데 말입니다. 아니 밤에라도 택시를 타고 가서 아버지 생전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들어주었다면 얼마 좋았겠어요. 억장이 무너지고 땅을 치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아무도 없는 썰렁한 병실에서 오직 내 울음소리만 처량하게 쩌렁쩌렁 울릴뿐이였죠. 갑자기 4살된 작은 딸이 문뒤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여 나는 애를 와락 끌어 안고 또 다시 애 이름을 부르며 경악을 해야 했지요. 비보를 받고 달려온 새 엄마에게 놀란 아이를 딸려 보내고 나는 마을의 몇몇 어르신들과 함께 아버지를 지키고 있었지요. 아버지는 그렇게 평온하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칠성판위에 조용히 누워있더군요. 아버지 령구앞에서 나는 그 긴 세월동안 꼭꼭 닫혀있던 언어들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상주라야 달랑 나 하나. 태를 묻은 한국 거창 달동네에 유년을 흘려놓고 7살에 뿌리내리고 자라던 만주땅 끝 마을을 떠나 타향에서 불쌍하고 외로이 생을 마감한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내가 세상에 홀로 서기만을 기다렸지요.
아버지 없는 세상은 정말 맵짜기도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게 징벌이라도 내렸는지 딸 둘 데리고 사는게 여간 숨 가쁘지 않았어요. 다행이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부터 내가 말문이 터져서 아버지랑 매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에 숨을 쉴수 있었지요. 아버지가 낮에는 해가 되고 구름이 되고 밤에는 달이 되여 나를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세상 풍파 다 이길수 있더군요. 지금도 나는 겁이 많아 길가에서 강아지나 벌레를 보면 화들짝 놀랍니다. 그럴때면 언제나 아버지 검은 그림자가 얼핏 나타나 나를 지켜준다는 생각에 활랑이던 가슴을 진정할수 있지요.
지난번 병원에서 에마라이를 찍을 때도 무서워서 눈을 감고 이를 쪼아대는데 아버지 검은 그림자가 비치여서 말을 주고 받다 보니 우르릉 거리는 기계소리도 참을 수 있었어요. 내가 무슨 일이 있는 날이면 아버지는 꼭 내 꿈속에 찾아왔지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날이면 나는 뒤로 자빠져도 영낙없이 횡재 맞는 날이였어요. 내가 좋은 날 궂은 날 아버지를 찾으니 아버지도 지치셨나요. 아니면 세월에 끌리여 삶에 연연하며 살아가던 내가 세월 따라 삶을 조곤조곤 가꾸는 모습에 한시름 놓으셨는지요. 지난번 꿈에서 이제 좀 쉬겠다며 2층 다락 침대에 올라가 누우시더니 어쩌면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군요. 나 지금도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어요. 그 때처럼 꿈에서라도 한번 찾아 오시면 안되겠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에 나랑 한마디 말도없이 사망시 가족에게 나오는 보상금이랑 저축통장, 집문서까지도 다 새 엄마께로 돌려 놓은 것도, 새 엄마께 종신보험을 들어준 것도, 어쩌면 당신의 화를 내가 아닌 새 엄마께 버럭버럭 낼수 있은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나도 생각을 바꾸고 아버지 의사대로 다 새 엄마께 돌려주었습니다. 아버지 내가 잘했지요.
지난번 내 생일 날 말입니다. 미역국을 뜨다말고 갑자기 나를 낳아준 그 여자 모습이 떠올라 눈물을 왈칵 쏟았습니다. 이제 외할머니도 됐겠다. 내 생일이면 돈 봉투에 선물까지 보내오는 효심 지극한 큰 딸에, 손 편지를 예쁘게 써주는 작은 딸이 있지, 또 주변에 고마운 이웃, 지인들, 특히 세상길이 막혀 숨을 쉴수 없을 때 내 마음을 콸콸 자아낼수 있게 이끌어 주는 평생지기도 생겼지, 아직은 어수선하고 넋두리같은 내 글에 애정을 담아주고 나를 아껴주는 문단의 많은 문인님들도 있지, 내가 복에 겨워 청승을 떨었다 아닙니까. 맹세하는데 내가 아버지를 배신한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노여워 마세요. 이제 와서 내 뿌리의 근원이 뭐가 궁금하고 가족 족보를 따진다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는 의연히 아버지 호적에 남겨진 아버지 딸이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물려주고 싶어했던 철밥통이 가끔은 부럽기도 합니다. 그동안은 그래도 미용기술로 애들 잘 키웠는데 몇 해 전 부터 약물 반응이 심해서 미용실도 그만 접었습니다. 미용실을 그만두고 밥줄을 잡은게 바로 가정집 일이예요. 오전 오후 두 집 일을 하는데 오전에 아침상을 봐드리는 집은 마침 경상도 집이라 식구들 모두 내가 하는 음식을 좋아합니다. 오후 집은 재중국 한국인 집인데 주인들은 회사에 다 나가고 빈집에 들려 청소만 합니다. 주인과 부딪힐 일도 없고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내게 준 철밥통은 말입니다. 이 튼실한 두 다리랑 봉건 보수적인 교육이지 싶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피 한방울 안 섞인 나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 부은 것 처럼 나도 세상 돌풍에도 꼬꾸러지지 않고 내 가지들을 끼고 최씨집의 일원으로 최종 행선지까지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끝없이 용기와 희망을 보내주는 고운 인향들속에서 나를 갈고 닦으며 어머니 아버지 주신 이 생명을 윤택나고 아름답게 가꾸겠습니다. 아버지. 나 오늘 따라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 꿈에 한번 오시면 안되겠습니까? 아버지랑 나랑 속에 쌓아두었던 부녀의 애틋한 정을 술잔에 비우고 채우기도 하고 의지가지 없는 빈 세상에서 속풀이를 하며 살아 가는 내 글에 아버지의 따끔한 평도 좀 해주시고요. 술기가 얼큰히 오르면 서로 마주보고 재채기를 하며 우리는 천상 못말리는 부녀라고 배 끓어안고 웃을텐데 말입니다. 아버지 나 이제 김치밥국도 제법 잘 끓이는데요.
심사평
응모글 제28편 심사평「아부이야 - 아버지에게 드리는 글」 심사위원 이동렬 동북아신문 대표,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가슴 먹먹한 父爱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줘
최화숙의 ‘아부야’는 가슴 먹먹한 사랑이야기를 쓰고 있다. 아픈 자식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희생한 부모님과, 그 사랑의 진가를 늦게나마 깨닫고 급기야 오열하고 후회하고 감격하며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시 자식에게 쏟아붓는 눈물겨운 인생스토리를 우리한테 들려준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화심리학자는 유전자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부모의 유전자를 절반씩 지닌 존재가 자식이기 때문에 우리 안의 유전자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게 만든다”는 것, “부모를 구성하는 유전자가 자신의 카피본을 남기기 위해 부모를 희생시킨다”고 정의한다. 유전자가 사람을 속이든 어쩌든, 아무런 조건이 없는 희생을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찬미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입양을 해서 얻은 자식을 친자식보다 더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많다. 순수한 인간적인 부모의 애(愛)가 더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다. 최화숙의 ‘아부이야’가 바로 그런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 글은 비교적 정교한 구성으로 주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입양아인 작자가 여섯살때부터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아프게 성장해온 이야기와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으로 차츰 “뿌리의 근원”에 대한 “심리장애”에서 해탈돼 “사랑”의 진의를 깨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특히 어머니, 아버지의 눈물겨운 희생은 그 사랑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채 아프게 성장해온 작자와 심적 갈등구조를 이뤄 자식이 무엇이고 부애가 무엇이며 부모의 직책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가슴 뭉클하게 들려주고 있다. 이것이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한편, 그 주제가 남긴 여운은 한없는 안타까움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순간부터 말문이 열렸다는 작자는 “낮에는 해가 되고 구름이 되고 밤에는 달이 되어” 찾아오는 아버지와 끝없는 대화로 그 안타까움을 극대화하고 있다. 결말에 가서 주제를 한층 심화시켜준 대목도 감명 깊게 읽힌다. 외할머니가 된 필자에게는 이제 “딸과 손녀, 지인, 그리고 문학이란 인생의 지팡이”가 있게 된다. 튼튼한 두 다리와 부모에게서 받은 “봉건적인 교육”이 ‘철밥통’이다고, “내 뿌리의 근원이 무슨 소용인가”며 “나는 의연히 아버지 호적에 남겨진 아버지의 딸”이라고 외치면서 글을 갈무리한다. 아버지가 남긴 “사랑”의 자산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찬미하고 있다.
이 글은 스물여덦개의 자연단락으로 구성됐는데 세부묘사가 디테일하고 생동해서 가슴을 울린다. 작자가 여섯살때부터 외할머니가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슴에 새겨진 추억의 구슬(세부)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촘촘히 꿰어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을 드라마틱하게 펼쳐보이고 있다.
문체상 이 글은 서간체형식으로 씌어진 수필이다. 편지특성에 맞게 인과(因果) 관계를 풀어나가면서 서간체 특유의 대화형식으로 세상 뜬 아버지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하듯 친근감 있게 호칭하며 자신의 애절한 내면세계를 보여주고자 애썼다. 글 첫머리부터 “아버지, 아버지가 어린 내 손을 잡고 거닐던 이 거리를 나는 내 키를 훨신 초월한 막내딸의 손을 잡고 걷고 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단락이 바뀌거나 과도구가 들어갈 때면 “아버지”를 호칭하며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절절한 이야기를 조근조근 풀어나가고 있다.
서간체의 글쓰기는 자유로운 표달방식을 탑재할 수 있다. 수필을 써온 경력이 있는 작자이기에 세부묘사와 함께 의론과 서정을 자유자재로 탑재를 해서 가끔 그 정감들이 아주 잘 익은 늦가을 감처럼 감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딸의 손을 잡고 밀착한 몸과 몸의 전율을 감촉 할 때면 행복 바이러스가 샘물처럼 솟아납니다.”, “그 유리알 같던 행복이…”, “천진난만해야 했던 내 동심도 내가 닫아버린 철조망에서 시들어 가고 말았죠”, “수면제를 먹고 의식이 몽롱해지면 언제나 캄캄한 어둠속에서 혼자 오돌오돌 떨고 있는 내가 보였어요.”, “령혼이 말라버린 내 신경...”, “어머니가 김치를 송송 썰어넣고 끓이다 팍팍 으깬 반짜개 쌀을 넣고 떡꾹 한줌 동동 띄워 끓인 김치밥국에는 아마도 자식을 못 낳는 한 여인의 서러움과 아버지에게 죄스런 마음과 나로 인한 처절함이 한데 어우러져 맛도 별미였는지도 모릅니다.” 등이 그러하다.
공황장애와 자폐증을 앓았던 소녀로부터 끊임없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할머니가 되는 과정을 비단결처럼 촘촘하게 결을 짜서, 세상풍진을 다 이겨낸 한 여인의 희로애락을 마치 독자들이 함께 겪는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글을 읽고 나면 “아, 자식이 뭘까?”, “아프다”, “눈물난다”,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감회에 가슴이 먹먹해난다.
제목도 특이하다. “아부이야”에서 “아부이”는 어무이(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전라도와 경남에서 쓰는 사투리이다. “아버지야”의 호칭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친근감을 강조하면서 제목에서부터 대화상대를 끌어내고 있다. 작자가 분명 인생의 깊이를 알고 깨닳음을 갖고 이 글을 썼다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보완해야 할 부분도 있다. 부녀간의 이야기 갈등, 즉 무조건적인 희생과 그 사랑을 이해못하다가 부모가 세상을 뜬 후에야 깨닫게 되는 갈등구조를 끌고가며 애써 주제를 표현하려는 노력은 보이나, 그 갈등을 극대화시켜 좀더 깊이 있게 주제를 풀어나갔더라면 글이 더 무게 있고 짜임새도 한층 정교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서간체의 특성상 이야기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가 있지만, 그래도 앞부분에서 시공간과 사건이 들쭉날쭉해 보이며 엉켜있는 것 같은 느낌을 순간적으로 받았다. ‘습관성 유산’ 사건을 앞에다 쓴 까닭일까? 또 이야기 경중을 가리지 않고 거의 디텔일하게 쓰다보니 좀은 읽기 갑갑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새엄마를 간략하게 쓴 것은 좋았다.) 글감은 취사선택을 잘 해야 된다. 선을 굵게 쭉쭉 풀어갈 때는 풀어가고 세부묘사를 할 때는 디테일하게 쓰는 기교도 필요하다. 서간체 수필의 문학성이 서두에서처럼 전편 글에 좀더 잘 녹아들게 했더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휴먼 인생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좋았다. 앞으로 더좋은 수필 창작을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소개
황유복 프로필
•1966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민족사 전공졸업. •1966년 7월부터 중앙민족학원에서 조교로 봉직. •1987년 9월~1988년 12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내다, 소련, 몽골,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20여 개 대 학에서의 강의 경력. •1972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과 창설 •1993년,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사회학학원 박사생지도교수 •(2013년 은퇴) •1989년 3월-2013년6월,(北京市民办教育法人)북경조선어학교 창설(1993 후속으로 심양, 단동,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후허호트, 석가장, 위해, 해구 등 10개 도시에 분교 설립. 무료로 한국어교육실시. •현재,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일본 아시아경제문화연구소 최고학술고문,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사회경제발전고문, “China Daily(中国日报)” 동북아국제관계평론가(特约专家), 중국텔레비전예술가협회 중일한PD포럼자문위원, 《중국민족》사 고문 등.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장춘 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 거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도문시 문화국창작실 주임, 연변문학 월간사 주임편집,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 등을 지냄. •국가1급작가. •현재 연변 시인협회 부회장, 연변 시랑송협회 고문. •1980년 문단에 데뷔. •해내외에서 시, 가사, 동시, 수필 등 여러 쟝르의 문학저서 30여권 상재.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단군문학상,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경력 다수.
이동렬 프로필
•1988 연변대학교 통신학부 조선어문전업 졸업 •1983년~1992년 9월 길림성 서란시 조선족중학교(고등학부) 고급교사 •1992년9월~2006년 길림성 용정시 교육TV 총편집 •2006년 1월~ 2012년 5월 한국 동북아신문 편집국장 •2012년 5월~ 현재 한국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2018년 10월~ 현재 중국신문(中国新闻 한글판) 차이나워크 잡지 편집주간 •현재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한국 <동포문학> 발행인, 재한조선족작가협회장(연변작가협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주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현대표. 중국작가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남북위원회 위원. •장편소설집 : 《고요한 도시》, 《낙화유수》 출간. •중단편소설집 : 《눈꽃서정》, 《토양대》 출간. •수상 :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천지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흑룡강신문 (장편)신춘문예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10여 차. 외, 한중문화교류대전, 한중일문학세미나 등 조직하고 한중문화교류대상, 동포문학상, 서울국제작가상 등 시상.
서옥란 프로필
•1997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대학교 특별초빙교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사지도교수. •주요 연구영역: 미디어와 사회, 대중문화, 국제커뮤니케이션 •선후하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중국국가교육부 파견 연구교수,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Center for Communication Research 중국대륙우수청년방문학자, 한국고등교육재단 IESF방문학자 등을 지냈다. 중국 국가급 성급 등 다수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미디어와 권력의 게임:박근혜탄핵안보도로부터 본 한국미디어생태환경의 현황”, “한국미디어의 싸드 보도 프레임연구”등 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 발표했으며, 《매체와 대중문화》, 《중국조선족 대중전파와 문화발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1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평론부분)수상, 《신문기자》잡지“올해의 10대 우수논문상”등을 수상.
전은주 프로필
•도문 량수 출생, 2005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입학, •2012년 동대학원 문학석사학휘 취득, 2019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학위 취득.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글쓰기 강사로 재직 중. •2008년 한국 계간 『창작21』 로 등단하여 다수의 시와 칼럼, 문학평론을 발표. 2012년 『시향만리』 신인상, 2020년 『동포문학』 시부문 최우수상, 2021년 혜산박두진 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평론분과 회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2019년부터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재한동포문학연구회 부회장으로 활동. 2022년부터 재한동포시치료연구회 대표로 시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논문으로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들의 ‘집 찾기’」 (2017),「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정체성의 위기와 자아성찰」 (2017),「한중수교 이후 재한조선족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나타난 정체성 연구」(2018),「조선족의 ‘역사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시론」(2019),「2000년대 이후 재한조선족 소설 연구 (2020),「중국 망명객 신규식의 디아스포라 시문학 연구」(2021),「재한조선족 문학의 ‘대림동’ 재현양상」(2021),「재한조선족 시문학의 형성과 인식의 변모연구」(2022) 등이 있다.
랑독과 음악편집 담당 소개
윤련순 프로필
•원 연변TV방송국주임아나운서, 방송지도, 연변작가협회회원 •전국방송사회작품평의에서 <매주경제> 국가 1등상(2008,12) •제6기 전국조선말방송우수작품평의 1등상 (2001년,10) 등 국가와 성 주 우수작품 평의에서 수십차 수상 •《TV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언어와 MC언어의 특징 (중국조선어문 2016.6), 《 아나운서의 시각에서 본 TV뉴스문의 특성 및 리해 》(중국조선어문2017.1),《 잔디의 고집》(연변문학 2016.9),《소통의 장을 열어가는 열쇠》(청년생활2014.12)등 론문,수필 20여편 발표
•주식회사 카와 STUDIO AKIRA 대표 •동북사범대학 음악학과 본과졸업 •2009년 주식회사 카와 설립 •일본에서 사진작가로 활약 •재일조선족운동회 회가 <함께해요 미래를> 작곡
기업 협찬 배너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전심혁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프레스: 리룡식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사장 10. 삼구물산 주식회사: 리성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사장 12. 주식회사 JCBC: 엄문철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주식회사: 최장록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소장 22. 주식회사 ZORUHARA: 이태권사장
개인 협찬 리스트
1.최우림: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부회장 2.장경호: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김광림:일본니가다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 박사 4.리대원: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박춘익:주식회사 BTU사장 6.리 숙:주식회사 미사끼(実咲)사장 7.최운학:일본훈춘동향회 회장 8.구세국: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9.박진우: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10.김정순:재일조선족심목회